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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호 교열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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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조류독감’이 말썽이다. 몇 해 전 이땅을 휩쓸기도 했고, 요즘 중국·동남아·유럽 쪽 양계장과 오리농장에서 떼죽음을 일으키는, 말하자면 세계에서 창궐하는 날짐승 돌림병이다. 며칠 전 육계협회 등 축산·가공업계 인사들이 신문·방송사를 돌았다. 조류독감 공포로 닭고기 소비·매출이 크게 떨어져 관련업계에서 심대한 타격을 받고 있으니, 그 점을 고려하여 실정에 맞게 보도를 해 줄 것과 병명도 오해할 소지가 있으므로 ‘조류 인플루엔자’(에이비언 인플루엔자·AI)로 바꿔 써 줄 것을 요청했다. 이런 걱정은 농림부나 방역 당국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상당수 신문·방송사에서 병명을 ‘조류 인플루엔자·AI·버드플루’ 따위로 바꿔 일컫고 있다. 양계농가나 관련업계 쪽이 입는 타격을 생각하면 그래야 마땅할 일이다. 〈한겨레〉에서는 저런 사정을 충분히 이해하지만, 하루아침에 이름을 달리 바꿔 부른다고 해서 그 병의 실체가 달라질 것도 아니고, 문제가 해결된다고 볼 수 없어 익히 쓰던 대로 ‘조류독감’으로 부르기로 했다. 인플루엔자가 ‘유행성 감기’이고 유행성 감기가 ‘독감’이며, 호흡기 질환이니 ‘조류독감’이라면 실체와 맞아들고 쉽게 알아볼 수 있는데다, 굳이 ‘인플루엔자’라는 외래어를 쓰지 않아도 되는 까닭이다. 더구나 조류독감에서 번진 질환으로서 사람·짐승한테 두루 옮기는 돌림병(인수공통전염병)도 경계의 대상이므로 경각심을 가지고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할 일이지, 그것을 숨기고 감출 일은 아닐 터이다. 예로부터 병은 자랑하고 소문을 내라고 했다. 한편으로, 닭고기 역시 익혀 먹으면 안전한데다 늦가을로 접어든 현재까지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조류독감이 발생했다는 보고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소비자들이 지레 겁을 먹을 일은 아닐 터이고, 신문·방송에서는 바깥 나라 소식을 전하면서 자칫 부풀리거나 독자들의 불안감을 자극하는 보도는 삼가야 할 것이다. 3년 전 중국을 중심으로 ‘괴질’이 유행한 바 있다. 원인과 치료법을 모르는 돌림병을 ‘괴질’이라고 한다. 세계보건기구는 곧 이 병에 ‘중증 급성 호흡기 증후군’(사스·Severe Acute Respiratory Syndrome)이란 기다란 이름을 지어붙였다. 이 병 역시 감기·폐렴을 앓게 되는데, 일종의 ‘변종 폐렴’인 셈이다. 미친개병을 ‘광견병’이라고 하고, 소의 뇌가 갯솜(해면)처럼 되어 숨지는 병을 ‘광우병’이라고 한다. 이 정도면 대충 알아들을 수 있다. 그런데, 광우병이 사람한테 옮아 걸린 병을 ‘변종 크로이츠펠트 야코프병’이라고 한다. ‘사람 광우병’이다. 이 밖에도 한센병, 파킨슨병, 알츠하이머병 … 들은 그 이름만으로는 전혀 병의 증세를 짐작할 수가 없다. 처음 발견한 사람을 존중하는 것은 좋지만 실체를 짐작하기 어렵게 한다는 점에서 적절한 작명 방식이 아니다. 간혹 그 이름이 지나치게 적나라해서 거북할 때 에둘러 지어 부르기도 하나 이는 예외에 속한다. 정부 쪽의 명칭인 ‘원전수거물센터’를 ‘방폐장’(방사성 폐기물 처분장) 또는 ‘핵쓰레기장’으로, ‘자원회수시설’을 ‘쓰레기소각장’으로 바꿔 부르는 것도 명색에서 일치한다.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를 ‘에이펙’ 아닌 ‘아펙’이라 일컫는 것도 아시아를 ‘에이시아’, 아세안(ASEAN)을 ‘에이시언’이라 하지 않는 것과 상통하는 까닭이다. 독자분께 용어 하나를 쓰는 데서도 이런 연유가 있음을 일일이 알려드리지 못함을 송구스럽게 생각한다.최인호/교열부장 golja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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