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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1.06 18:01 수정 : 2005.11.06 18:01

김형준 국민대교수·정치학

세상읽기

정치권에 10·26 재선거의 후폭풍이 거세게 불어닥치고 있다. 선거에 참패한 열린우리당은 노무현 대통령의 간곡한 당부에도 불구하고 지도부 전원이 사퇴하면서 비상대책위 체제로 전환하였다. 노 대통령은 선거 결과에 대해 “국정운영에 대한 평가”라고 규정했지만 여당은 친노와 반노로 나뉘어 선거 패배 책임을 둘러싸고 공방이 치열하다.

노 대통령은 역대 어느 대통령도 결코 시도해보지 못했던 다양한 정치 실험을 하고 있다. 집권당 총재 자리를 단호히 거부하고 평당원으로 남으면서 당·정분리의 원칙을 내세웠다. 또한, 여권 내 유력 대권후보를 내각에 전면 포진시키는 독특한 대선 후보 관리 시스템을 작동시켰다.

하지만, 이러한 노 대통령의 정치 실험은 기대와는 달리 집권당의 무기력을 가속화시켰다. 열린우리당 싱크탱크인 열린정책연구원의 지적대로 당·정분리로 당은 오히려 대통령과 정부에 대한 피동적 지원세력에 머물면서 자율적 이미지가 상실되어 지지율이 급락하고 있다. 선거구제 개편, 대연정 등 중요한 정치 의제가 대통령과 소수 인사가 참여하는 외부 회의에서 주도됨으로써 열린우리당은 ‘무늬만 여당’인 거수기 정당으로 전락했다. 어설픈 당·정분리가 여권 위기를 초래한 것이다.

노 대통령은 책임총리제를 기반으로 하는 분권형 국정 운영과 국정원, 검찰, 경찰, 국세청 등 과거 권력 유지를 위해 활용했던 권력기관을 중립지대로 돌려놓는 과감한 정치 실험도 진행 중이다. 하지만, “대통령직 못해먹겠다”, “재신임 국민투표를 하겠다”는 돌출 발언과 비생산적인 정치 논쟁의 최전선에 스스로 포진함으로써 대통령의 권위를 무너뜨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한마디로, 노 대통령의 정치 실험들은 권위주의를 해체하는 데는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권위를 유지하는 데는 실패했다. 권위주의는 권력이 제도화되지 못하고 사유화됨으로써 권력자의 지시와 명령이 법과 원칙보다 우선하는 구조이기 때문에 청산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선출되어 정통성을 갖춘 대통령의 권위는 국민을 설득하고 갈등을 조정하는 핵심 요체이기 때문에 청산이 아닌 보존의 대상이다.

노 대통령과 청와대 참모들은 참여정부의 정치 실험이 성공하지 못한 이유로 척박한 정치 토양, 급격한 변화에 대한 정치권의 적응능력 부족과 역사의식의 부재, 아직도 독재시대의 유산에 젖어 있는 준비 안 된 국민을 염두에 두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대통령이 스스로 권위를 무너뜨리고 비생산적인 정치의 한복판에 선 것이 어쩌면 정치 실험 실패의 근본 원인일지도 모른다.

노 대통령은 “내년 초에 국가 미래를 위한 구상과 자신의 진로에 대해 발표하겠다”고 밝혔다. 그의 내년 중대 제안에 비상한 관심이 쏠리고 우려도 커지고 있다. 노 대통령은 중대 제안에 대통령의 권위를 치명적으로 훼손하는 정치적 승부수를 던져서는 안 된다. 이러한 정치 모험은 한국 정치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필연적으로 혼돈을 잉태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국민이 부여한 대통령의 신성한 권위가 소중하게 간직되고 대통령은 국정에만 전념하는 구상이 핵심이 돼야 한다.

세계 최초로 산악 그랜드슬램을 이루어낸 박영석씨는 모든 것을 이뤘지만 그랜드슬램 달성 기념 풋프린트(족문) 아래 ‘이제부터 시작이다’라는 글귀를 남겼다. 또한 “자연은 항상 무섭지만 무엇보다도 두려운 것은 자만과 포기하고 싶은 유혹에 맞서 싸우는 것”이라는 말도 전했다. “자만하지 말고 다시 시작하라.” 정권이 아닌 국가를 살린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역사와 대화를 시작한 노 대통령이 한번쯤 깊이 음미해 볼 만한 고언이다.


김형준/국민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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