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11.07 18:15
수정 : 2005.11.07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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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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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칼럼
논산훈련소에 들어갔을 때였다. 신발을 지급받았는데 발에 맞지 않았다. 바꿔달라고 했더니 바꿔주지 않으면서 신발에 발을 맞추라고 소리를 쳤다. 그 훈련화를 신고 훈련을 받다가 오른발 뒤꿈치가 벗겨졌다. 그냥 참고 아침저녁마다 구보를 해서 훈련장을 나갔다 왔더니 발이 점점 부어올랐다. 훈련을 마치고 난 저녁 소대장이 아픈 사람 있으면 나오라고 해서 나갔더니 한 줄로 세우고는 전신주 만한 봉을 어깨 위로 들어올리는 봉체조를 시켰다. 다음날도 아픈 사람 나오라고 했지만 나가지 않았다. 그랬더니 발목과 발등까지 부어올라서 농구화 속으로 발이 들어가지 않았다. 나중에 군의관은 내 발을 보더니 왜 이 정도가 되도록 오지 않았냐고 호통을 치는 것이었다. 우리에겐 그런 게 군대였다.
졸병 때는 자다 말고 불려나가 ‘줄빠따’를 맞을 때가 있었다. 엎드려뻗쳐를 시켜 놓고 고참이 몽둥이를 들고 패기 시작한 다음 그 아래 상급자가 또 한 차례 패고 들어가면 그 다음 고참이 몽둥이를 인계받아 훈계를 하고 또 때리는 식이다. 훈계 내용이라는 게 청소가 어쨌느니 고참에 대한 예의가 어쨌느니 하는 것들이다. 맨 아래 졸병은 끝날 때까지 맞는다. 그것도 군대생활에 적응해 나가기 위한 통과의례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군대에 다시 끌려가는 꿈을 꿀 때가 있다. 꿈속에서도 나는 군대 갔다 왔는데 왜 또 부르느냐고 억울하다고 하소연을 하면서 내무반으로 떠밀려 들어갈 때가 있다. 벌써 몇 십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내 무의식은 군대에 갇혀 괴롭고 마음 편치 않은 날이 있다. 광주항쟁 때 차출되어 전라남도의 한 국도에서 바리케이드를 치고 총을 들고 서 있었던 일은 내 인생의 행로를 바꾸어 놓은 부끄럽고 가슴 아픈 기억이 되었다.
대한민국 남자들이 가장 신나게 이야기하는 화제 중의 하나가 군대이야기이다. 그러나 군대에서 겪었던 모든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다. 군대 가서 얼마나 힘이 들었고 얼마나 남자답게 그 시절을 헤쳐 나갔는가에 대해서는 되풀이해서 이야기하지만 얼마나 비굴하고 비겁한 시간을 견뎌야 했고 부끄러운 일들이 많았는가는 잘 꺼내놓지 않는다. 명령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부당한 일들을 당연시하며 합리화했던가를 반성하지는 않는다. 잘못된 줄 알면서도 복종해야 하고 부당한 줄 알면서도 저항할 수 없던 스물 몇 살의 자아가 분열을 거듭하다가 어떤 날은 술 한 잔에 의지하여 엉뚱한 방향으로 폭발하거나 휴가를 나와 성매매 집결지로 몰려가기도 하고 거리에서 집단 난투극을 벌이기도 하던 기억들은 잘 이야기하지 않는다.
얼마나 외로웠던가, 사내들끼리 외딴 산악이나 바닷가 초소에서 주어진 운명을 살아가기 위해. 얼마나 무거웠던가, 분단된 나라에 태어나 엠16소총을 메고 밤의 능선을 넘던 청춘이. 얼마나 자조하고 힘겨워했던가, 때 묻지 않았던 스무 살에서 거칠고 속악한 나이로 변해가는 자신을 지켜보며. 술자리에서 떠들어대는 과장된 언어들도 사실은 아직도 군대의 폭력적인 기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반증이다.
지금 내 아들도 군에 가 있다. 자식을 군대 보내놓고 “요즘 군대 많이 좋아졌지.” 이런 말을 듣는다. 수십 년 전부터 들어온 말이다. 좋아진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총기난사로 죽거나, 제대 후 바로 암에 걸려 죽거나, 군대 보내놓은 자식이 장교 부인과 딸 속옷 빨아주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부모들은 속이 뒤집힌다. 국가가 국민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겨우 이 정도란 말인가. 남자는 군대 갔다 와야 사람이 된다고 말하며 자식을 군대 보냈는데 어느 부모가 이게 사람 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겠는가.
도종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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