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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1.10 17:55 수정 : 2005.11.10 17:55

류정순 빈곤문제연구소 소장

발언대

2년 전 갑자기 첫추위가 닥친 어느날 노숙인 기초생활보장 상담을 나갔다. 그때 길에서 만난 어느 아주머니는 상담은 하는 둥 마는 둥하면서 자꾸 내 스웨터를 만지작거리더니, 벗어달라고 했다. 날씨에 걸맞지 않게 얇은 옷을 입고 있었다. 뼛속까지 스미는 첫추위의 고통을 견딜 수 있게 하는 스웨터 한 벌보다 더 절실한 기초생활 보장이 없었을 텐데, 난 상담을 한답시고 엉뚱한 질문만 해댄 것이다. 그러나 그날 나도 속옷을 변변히 입지 않아서 벗어줄 수가 없었다.

그 뒤 몇 달이 지난 초봄에 마침 그 스웨터를 입고 있던 날, 그 아주머니와 길에서 마주쳤다. 마침 스웨터 안에 셔츠를 받쳐 입고 있었기에, 기쁜 마음으로 스웨터를 벗어주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대뜸 화를 내며 “곧 날씨가 더워질 텐데 그 옷을 어떻게 가을까지 보관할 수 있겠느냐”고 했다. 집이 없는 거리의 사람들은 생활용품을 전부 짊어지고 다니는 ‘달팽이족’이다. 아무리 긴요한 물건이라도 계절이 바뀌면 버릴 수밖에 없다. 빈민 상담을 한다는 사람이 그것도 모르고 봄에 겨울 스웨터를 주겠다고 한 나 자신이 몹시 부끄러웠다.

최근 정부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아펙) 정상회의를 겨냥한 테러를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전국 지하철역과 철도역 구내 물품보관함을 모두 폐쇄했다. 어느 언론 인터뷰를 보니, 서울역 관계자는 “이참에 노숙자들이 물품보관함에 이불을 보관하는 관행이 근절돼야 한다”고 했다. 설령 물품보관함 운영 중단의 목적이 테러 방지에 있더라도, 그것은 과거 어떤 국제행사 때의 노숙인 통제책보다 달팽이족들에 큰 고통을 주고 있다.

아무리 달팽이족이라고 해도 밤마다 동장군과 사투를 벌여야 하는 겨울을 앞두고 이불 없이 한뎃잠을 자는 것은 크나큰 고통이다. 이불을 넣어둘 물품보관함은 노숙인에게는 추위로부터 생명을 지켜주는 공간이다. 노숙인들도 다른 시민들과 똑같이 동전을 넣고 보관함을 이용한다.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불과 같은 생존에 필수적인 재화를 보관하는 물품보관함을 아무런 사전 통보나 대안 제시 없이 박탈하는 조처를 취한 관계자는 국민 생활양식을 모르는 엉터리 공직자이자, 소비자 주권을 침해하는 사업자다.

이번 아펙 정상회의의 주제는 ‘하나의 공동체를 향한 도전과 변화’라고 한다. 그 ‘하나의 공동체’가 지향하는 것이 우리 사회에서 가장 소외받은 계층의 생명줄을 빼앗는 것이란 말인가? 하나의 공동체이길 바라고, 빈민의 도전으로 인한 사회혼란을 방지하기 위한 모색이라면 그 과정에서부터 가장 소외된 국민의 생활양식을 존중하고, 그들이 살아갈 수 있는 길을 터 주어야 마땅하다. 당국은 물품보관함 폐쇄 조처를 즉각 철회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아펙 기간 동안 노숙인이 물품을 보관할 수 있는 임시 컨테이너 하우스라도 설치해야 한다.

백 개 가진 자가 한 개를 빼앗겼을 때와 한 개 가진 자가 마지막 한 개를 빼앗겼을 때의 분노와 상실감은 비교할 수 없다. 프랑스의 빈민사태가 남의 나라의 불이라고 안이하게 대처할 것이 아니다. 당국자들이 보기에는 하찮은 물건일지라도 달팽이족들에게는 더없이 귀중한 물건임을 인식하고 그들의 생활양식을 존중해 주는 것이 기초생활보장법에 명시된 빈민의 생존권 보장 방안이자 주택법에 명시된 최저주거기준 보장의 첫걸음이다.

류정순/빈곤문제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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