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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1.13 17:43 수정 : 2005.11.13 17:43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경제학

세상읽기

1970년대까지 유행하던 농담 중의 하나가 “미국 가면 거지도 양담배 피우고 애들도 영어를 잘 한다더라” 하는 것이었다. 외제 물건의 질이 국산품의 질보다 월등하게 높고, 돈이 없어 문법책으로만 영어를 배우다 보니 회화 한 마디 하기가 힘들었던 가난한 시절 우리의 모습을 반영하는 이야기이다.

30~40여 년이 흘러 나라는 훨씬 잘 살게 되었지만 선진국에 대한 선망은 그치지 않고 있다. 특히 요즘 벌어지는 재벌의 도덕성 논쟁을 보면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지난번 칼럼에서 재벌들의 그룹구조를 유지해 주기 위해 필요하다면 국민연금이나 국영은행이 지분참여를 하여 2, 3세 경영자를 한시적으로 지원해 주면 어떨까 하는 제안을 했더니, 많은 분들이 “그 나쁜 놈들을 왜 도와줘야 하느냐” 하는 질책을 하였다. 일부에서는 필자가 외국에 오래 살다 보니 한국 물정을 잘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면서, 삼성이 옛날에 사카린을 밀수했던 사실까지 상기시켰다.

맞는 말이다. 우리 재벌들은 나쁜 짓을 많이 했고, 아직도 많이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재벌들이 밉다고 옥죄어 그들이 망하거나 해체되었을 때 그들을 인수할 외국 자본들은 재벌들보다 더 도덕적인가?

1960년대까지 수백 년 동안 엄청난 자본이 원주민 살육, 영토 약탈, 식민지 수탈을 통해 축적되었다. 19세기 중반까지 노예를 부려 생산한 설탕, 면화 등의 원료를 썼던 기업들이 번 돈은 어떤 도덕적 기준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우리는 삼성이 사카린을 밀수했다고 비난하지만, 세계 유수의 영국계 은행은 영국 정부가 중국에 아편을 팔다가 중국 정부의 규제에 부딪히자 벌인 아편전쟁에 돈을 댄 전력이 있다.

우리 재벌들이 부당하게 노조를 탄압한다고 하지만, 미국의 많은 기업들은 과거에 사설 탐정단을 고용하여 파업을 진압하면서 파업하는 노동자를 쏴 죽이기까지 했다. 자본주의 초기에 선진국 기업들은 아동노동에 대한 최소한의 규제마저도 반대하였다. 지금은 노동자를 존중하기로 유명한 스웨덴 기업들도 20세기가 되어서야 1846년 도입되었던 아동노동을 금지하는 법을 제대로 지키기 시작하였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중남미에서 활동하는 많은 미국 기업들은 심지어 군부 쿠데타까지 지원하면서 후진국 정치에 개입했다.

얼룩은 지나간 역사 속에만 있는 게 아니다. 엔론, 월드콤 등의 사례에서 보듯이 지금도 대규모 회계부정이 많고, 부정부패에 연루된 회사도 많다. 이들이 후진국에 진출하면 노동자를 착취하고, 환경을 파괴하며, 후진국의 민간요법을 훔쳐 약으로 만들어 특허를 내는 등 좋지 않은 짓을 더 많이 한다. 특히 문제가 많은 것은 사모펀드들인데, 이들 중 많은 수는 조세 도피처에 위치하여 노골적으로 탈세를 하고 있으며, 지배구조도 불투명하다. 그러다 보니 그 뒤에 버티고 있는 돈 중에 부정한 돈이 있는지 없는지도 알 길이 없다.

외국자본이 다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현시점에서 선진국 기업들이 평균적으로 우리나라 기업들보다 도덕성이 더 높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굳이 따지자면 역사적으로 선진국 자본들은 우리 재벌들보다 더 나쁜 짓을 많이 했다. 과거사까지 들추면 ‘깨끗한’ 자본은 많지 않다.


중요한 것은 지금 있는 자본들을 어떻게 법적 규제와 사회적인 압력을 통해 바르게 행동하도록 하는가이다. 이런 면에서 그나마 우리 사회에 뿌리가 있고 국민에게 명백히 역사적 빚을 지고 있는 재벌들이 더 통제하기가 쉽기에 이들이 외국 자본에 넘어가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다.

장하준/케임브리지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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