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11.13 17:44
수정 : 2005.11.13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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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 단국대 교수·기생충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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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한국사회
며칠 전 친구들과 그 식솔들을 데리고 한 패밀리 레스토랑에 가서 식사를 했다. 철퍼덕 주저앉는 내 스타일을 버리고 테이블에 앉아야 하는 게 불편했고, 종업원들이 무릎을 꿇고 주문을 받는 과잉친절에 심기가 뒤틀렸지만, 천방지축인 아이들을 데리고 갈 수 있는 곳은 그런 데밖에 없었다. 과연 아이들은 물을 만난 고기떼처럼 신나게 놀고 먹었지만, 우리는 순전히 비싼 음식값이 아까워 연신 포크질을 했다.
가본 사람은 알겠지만 소위 패밀리 레스토랑에서는 주문을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한다. “내가 해산물을 시켰으니 너는 소의 갈비뼈를, 그리고 너는 치킨샐러드를 시켜라.” 다른 사람이 시킨 음식을 나누어 먹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우정이 싹튼다. 냉동육의 유해 논쟁을 떠나 미국 애들은 식사를 할 때도 이렇게 ‘조화와 협동’을 온몸으로 배운다.
패밀리 레스토랑이 미국 외식문화의 상징이라면, 우리 음식의 대표는 바로 삼겹살이다. 패밀리 레스토랑과 달리 삼겹살은 무한경쟁의 장이다. 내가 익혀놓은 고기를 남이 먹고, 남이 찍은 고기를 내가 가로챈다.
“왜 나만 뒤집냐?”며 언성이 높아지고, “숨 좀 쉬면서 먹어라”는 핀잔이 오간다. 내가 아는 어떤 이는 더 많은 고기를 먹으려고 채 익지도 않은 벌건 고기를 씹지도 않고 삼키는데, “삼겹살은 바싹 익혀서 먹어야 한다”는 말도 사실은 남보다 더 많은 고기를 먹으려는 수작에 불과하다. 조화와 협동이 발을 붙일 구석은 어디에도 없고, 오직 남보다 더 많이 먹겠다는 경쟁심만이 분위기를 지배한다. 허기진 배를 움켜쥔, 경쟁에서 진 사람의 “고기 더 할까?”라는 물음은 배불리 포식한 승리자의 “이제 냉면 먹자!”로 일축되고, 서로 간에 남은 건 앙금뿐이다.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나온 외국인들이 곧장 집에 가는 것과 달리, 우리는 그 앙금을 해소하려고 2차를 가고, 2차도 부족해 3차를 가지만, 한번 틀어진 심사는 여간해서 풀리지 않는다. 살인적인 입시지옥을 통해 경쟁만을 배워온 우리 마음의 흉포함은 삼겹살 문화로 인해 확대·재생산되는데, 그러고 보니 삼겹살, 생선회, 닭갈비, 감자탕 등 우리가 회식 때 즐겨먹는 음식들은 하나같이 공동의 음식을 놓고 참석자들이 자웅을 겨뤄야 하는 것들이다. 사회적 갈등이 조화롭게 극복되지 못하고 극한적인 대립으로 점철되는 까닭도, 여·야가 사생결단의 이전투구를 계속하는 것도 혹시 이런 데서 비롯된 게 아닐까 싶다. 정치인들이 삼겹살 파티를 벌이는 게 목격된 직후 법무장관의 수사지휘권을 놓고 여·야의 격돌이 있었던 걸 보면 이게 근거없는 억측만은 아니리라.
그렇게 본다면 냉동육이 입에 맞네 안 맞네를 떠나서, 그들의 문화로부터 좋은 점을 취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본다. 삼겹살만을 놓고 경쟁하는 대신 다른 사람들이 각자 시킨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웃음지을 수 있고, 서로 간의 앙금이 없으니 1차만 해도 충분하고, 집에 갈 때 따뜻한 정까지 간직할 수 있는 회식 자리가 만들어진다면 좋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해서 삼겹살집이 당장 감자탕집과 합치라는 말은 아니다. 길은 사실 우리 마음 속에 있다. 다른 사람이 몇 점을 먹었는지 견제하기보다는, 인류의 조상이 돼지라는 베르베르의 말을 상기하면서 겸허히 삼겹살을 먹는다면, 삼겹살집에서도 조화와 협동은 얼마든지 길러질 수 있을 것이다. 월요일인 오늘, 상생의 삼겹살을 먹어보자.
서민/단국대 교수·기생충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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