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11.15 18:27
수정 : 2005.11.15 18:27
유레카
1966년 1월15일. 참으로 생소한 제목의 잡지가 세상에 얼굴을 디밀었다. 〈창작과 비평〉. 이 계간지가 감당할 역사적 책무의 부피를 짐작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권두 평론을 쓴 스물여섯 살의 편집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새로운 창작과 비평의 자세’. 3년 전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그는 이런 야심적인 제목의 글을 맺으며 되물었다. “먼 길을 어찌 다 가며 도중의 괴로움을 나눠줄 사람은 몇이나 될까?”
그로부터 40년. 2005년 가을호는 ‘통권 129호’를 기록했고, ‘청년 편집인’ 백낙청은 고희를 바라보고 있다. 많은 이들이 괴로움을 나누는 사이, 더 많은 이들이 지혜를 보탰다. 신경림 황석영 리영희 강만길 김지하 고은 …. 어두웠던 시절 ‘창비’는 이름만으로도 등불이었다. 필자들은 ‘강단 밖 강사’들이었으며, 그들의 글은 교과서보다 값진 교과서였다. 시인 김용택의 고백처럼 창비는 “입학도 졸업도 없는 영원한 학교”였다. 창비의 책들은 나침반이자 무기였다. 〈객지〉가 전태일의 노동현실을 깨우쳐줬다면 〈농무〉는 척박한 농촌상황의 지침서였다. 〈전환시대의 논리〉로 ‘진실의 충격’을 맛본 지식인들에게 시대의 허위의식은 더 용납되지 않았다. 이해찬 총리의 회고대로 “밖을 보지 못하도록 쳐놓은 검은 장막을 걷어내는 느낌”이었다.
창비의 역할은 계속됐다. 한국 자본주의 성격을 둘러싼 논쟁과 계급론 분석은 투쟁의 든든한 보루였다. 분단체제론은 여전히 통일운동의 논리적 저수지로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동아시아 연대와 근대성에 대한 고찰은 지성사에서 그 역할의 막중함을 웅변했다. 잇따른 판금과 폐간, 등록취소는 차라리 정당성을 웅변하는 상징이었다. “견디는 가운데 기약된 땅에 다가서리라 믿는다.” 청년 백낙청은 앞의 글에서 이렇게 기대했다. 기약된 땅이 어딘지 알 수 없지만, 40년을 견딘 건 우리 지성사의 축복이다.
김영철 논설위원
yc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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