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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영 한신대 교수ㆍ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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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전망대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보수 세력은 집결하는데, 진보 세력은 우울하다. 쌀 협상 비준 문제로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은 대치하고 있다. 이제 아태경제협력체(아펙) 정상회의가 열리는 부산에서, 또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가 열리는 홍콩에서, 반 세계화 진영은 다시 한번 집결할 것이다. 언뜻 젊은 민주화 세력은 87년 이후 불패의 가도를 달려온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간의 정치적 진출에도 불구하고, 깃발이 선명하게 나부끼지 않는다.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의 선거 실패가 충격을 주었지만, 이들에게 진정 가을이 드리운 게 아닌가 여겨지는 것은 그들의 지향이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70, 80년대 그 뜨거웠던 민주화 세력의 수원지 역할을 했던 민족경제론과 민족문학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현실이 변하면 이론도 진화하는 것이 마땅하다. 민족문학론도 그렇다. 왕년의 민족문학론자가 민족문학을 폐기해야 한다고도 말하지만, 수정된 민족문학론으로 다시 정리하려는 논의도 뚜렷하다. 민족문학론은, 세계시민으로서 사유해야 할 필요성, 세계문학의 가능성에 대해 전면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그것이 민족의 매개 없이도 가능하다고 보지도 않는다. 오히려 전지구적인 ‘포스트모던’ 문화에서 드러나는 사유와 양식의 획일성에 맞서는 역할을 부여한다(김명환 교수). ‘국민문학’에 대항하는 ‘진영’과 ‘운동’을 묶어주는 구호나 표어로서는 민족문학의 용도를 폐기한다. 이제 민족문학은 ‘남한의 국민문학’도 겸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민족문학은 세계문학 자체가 위협받는 시대에 문학의 생존공간을 확보해주는 민족어문학이자 지역문학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이다(백낙청 교수). 민족문학론은 그나마 질서있는 조정을 거치고 있지만, 민족경제론은 훨씬 더 강력한 도전에 직면했다. 영어 붐이 극성이지만, 민족어의 발전이 지식·사고 능력을 담보한다는 믿음과 사실에 쉽게 도전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세계화, 기술혁명과 생산방식의 변화, 사회주의권 붕괴와 같은 90년대의 환경 변화로, 민족경제론과 같은 토착 경제이론은 쉽게 의심과 무시의 대상이 되기 일쑤였다. 게다가 민족민주운동은 ‘민족해방’론과 ‘노동해방’론으로 분열되고 말았다. 민족경제론에는 미몽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러나 미래를 향한 깃발이 사라진 곳에 ‘비판적·개방적 지역주의’론이 새롭게 등장한다. 일국주의적, 계급주의적 전망이 현실 부적합하다는 인식에 이르면 국민국가, 민족국가, 그리고 국가를 뛰어넘는 지역을 함께 포함하는 복합적 공동체를 구상하게 된다. 필자는 이를 ‘한반도-동아시아(동북아)경제’, ‘개방형 민족경제’라고 부르고 싶다. 여기에서 민족경제는 세계화의 신자유주의적 측면을 교화하면서 미완성의 국민경제를 형성·재구성하는 이중의 목표를 수행한다. 민족경제는 ‘분단체제를 극복한 한반도경제’를 의미하지만, 통일운동의 당파성을 지시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한국경제’의 발전이 중요하게 인식된다. 그리고 한반도, 황해·동해 연안의 중국·일본 지역, 극동 러시아, 몽골, 아세안 국가를 더한 ‘동아시아’ 지역의 네트워크형 협력에 전략적 의의를 둔다. 민족경제, 민족문학이 함께 직면하고 있는 것은 복잡하고 경계선이 유동적인 세계다. 또 그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참으로 곤란한 문제에 정직하게 도전하려는 마음이다. 그러한 점에서 역시, 다시, 문제는 리얼리즘이다.| 한겨레 필진네트워크 나의 글이 세상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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