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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1.20 17:09 수정 : 2005.11.20 17:14

유레카

해운대해수욕장 서쪽 끝에 있다. 빼어난 경관으로 인해 4만5천여평 섬 전체가 부산기념물 46호로 지정돼 있다. 해방후 군사작전지역으로 묶여 있다가, 65년 동쪽 해변만 개방됐다.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아펙) 정상회의 덕택에 57년 만에 모두 개방됐다.

동남쪽 해변에 세워진 인어공주상은 동백섬의 상징. 1974년 조성됐으나 87년 태풍 셀마에 유실됐고, 89년 지금의 모습으로 다시 조성됐다. 해운대구 홈페이지에는 인어상의 유래를 이렇게 전한다. “아주 오랜 옛날 바다속 인어나라 나란다국에서 무궁나라 은혜왕에게 시집온 황옥공주는 보름달이 뜨는 밤마다 황옥에 떠오른 고국의 모습을 보며 그리움을 달랬다.” 향토사학자들은 이 설화를 그저 지어낸 이야기로만 생각하지 않는다. 〈삼국유사〉가 전하듯이, 황옥공주는 수만리 바다 건너 가락국 시조 김수로왕에게 시집온 허황옥이라는 것이다. 김수로왕릉 정문에 새겨진 두 마리의 물고기 무늬와 불탑 장식은 지금도 인도 아요디아 건축에서 흔히 보이는, 문명교류의 흔적으로 꼽힌다.

김수로는 김해(당시 지명은 금관)의 무역상이었다. 그의 무대는 바다 건너 인도의 아유타국에까지 이르렀으며, 바닷길을 다스리기 위해 사병 2천여명을 거느렸다. 해상왕 장보고보다 무려 800년 앞선 일이다. 김수로는 아유타 국왕을 만나는 자리에서 황옥공주를 보고는 부인으로 맞겠다고 한다. 그러자 왕은 나라를 세워 보위에 오른다면 딸을 보내겠노라고 답한다. 그는 돌아와 가락국을 세운다. 황옥공주가 바닷길 2만5천리를 건너 지금의 해운대에 도착한 것은 서기 48년께. 두 사람의 결혼은 고대의 세기적 로맨스이자 동서 문명교류가 낳은 결실이었다.

지금 부산 동백섬에는 한반도 유사 이래 가장 많은 정상과 각료, 기업인 등이 몰려왔다. 황옥공주가 상륙한 지점에서 문명교류의 가장 성대한 무대가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곽병찬 논설위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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