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11.21 17:46
수정 : 2005.11.21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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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신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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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신칼럼
홍석현 전 주미대사의 입국과 검찰 출석 과정에서 불거진 ‘경호원 기자’ 논란은 취재 뒷담화라기엔 너무 무겁고 공방이라기엔 시시비비가 명확하다. 결론부터 말하자. 〈중앙일보〉의 일부 기자들은 기자로서보다 사주를 보위하는 조직 구성원의 직분에 더 충실했던 것으로 보인다. 검찰 출입기자를 지휘하는 부장이 일본까지 날아가 홍씨를 수행해 함께 귀국하고 공항 보안구역 출입증을 발급받은 현직 기자들이 보안구역에서부터 홍씨를 호위했으며 그를 취재하려는 타 언론사 기자들과 몸싸움까지 벌이며 취재를 적극적으로 차단했다. ‘의전’의 차원이라고 강변하지만 ‘보디가드가 요인을 보호하는 모습과 똑같았다’는 비판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검찰 출석 과정에서 중앙일보의 한 사진기자는 홍씨의 앞을 막아선 시위대원의 목을 뒤에서 팔로 조른 뒤 옆으로 내동댕이쳤다. 중앙일보의 사진부장은 질서를 깬 훼방꾼에겐 그 정도도 점잖은 제지였다며 경호원 기자라는 비난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반발한다. 그러나 그 반발은 마음에 와닿지 않는다. 오히려 ‘팔이 안으로 굽는 것은 인지상정’이라는 그 부장의 실토가 더 설득력있게 들린다.
공항에서의 지나친 의전(?)으로 비판을 받은 중앙일보 기자는 “우리 회사 최대 주주에게 험한 일이 닥쳤을 때 방치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해 스스로의 판단으로 결정을 내린 것”이라고 말했다. 내겐 그것이 병적인 ‘합일화’의 한 사례로 보인다. 합일화란 ‘자기’와 ‘자기가 아닌 것’을 구별하지 못한 상태에서 중요한 인물(혹은 조직)의 태도와 행동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상대를 이상화하고 그의 신념이나 인격, 정서 등을 마치 자기 것인 양 무의식적으로 동일시하는 현상이다. 4·19 직전의 자유당 행동대원들이나 일부 종교의 광신도들이 그런 경우다. 권력자의 개인적 심정에 지나치게 공감하는 이들도 그런 범주에 속한다. 평상시라면 하지 않았을 법한 퇴행적 모습들이 특정 관계 속에만 들어가면 서슴없이 튀어 나온다. 자기의 직업적 정체성이나 본분을 잃고 권력자와 합체가 된다.
이번 ‘경호원 기자’ 논란에서 나타난 일부 중앙일보 기자들의 행태가 바로 그렇다. 사장이나 편집국 간부가 홍씨를 마중간 것에 대해서는 별다른 시비가 없다. 현직 기자가 경호원이란 비아냥을 들을 만큼 기자로서 직업적 본분을 잃은 게 문제다. 다른 언론사 기자들도 사장이나 사주와 관련한 사안에서는 의전기자나 수행기자가 되는 일이 일종의 관행이라는 어느 중견기자의 고백은 씁쓸하다. 노예가 채찍으로 등을 맞는 것을 목격한 성자의 등에 시뻘건 채찍 자국이 새겨졌다는 고사는 인간의 ‘공감력’을 설명할 때 흔히 동원되는 비유다. 공감은 그 사람이 되지 않고서, 즉 자기 정체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타인의 감정에 동참할 수 있는 건강한 형태의 동일시 능력이다. 하지만 ‘경호원 기자’ 현상은 건강한 공감이 아니라 병적 동일시의 한 형태인 합일화에 속한다. 평기자가 자신의 부장, 국장을 부를 때도 직책 뒤에 ‘님’자 호칭을 달지 않는 것이 기자사회의 문화다. 막강한 권력자를 만나도 먹히지 않고 기자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일종의 훈련인 셈이다. 그토록 자기정체성이 예민한 집단에서 그렇게 쉽사리 권력자와의 합일화가 일어난다는 사실은 이해하기 어렵다.
‘사장, 힘내세요’ 류의 손팻말을 들고 권력자의 내면에 들어앉은 기자들은 다시 경계 밖으로 나와 심리적 거리를 유지하길 바란다. 기자는 사람에 대한 건강한 공감력은 유지하되 합일화되어서는 안 되는 직종의 사람들이라고 우리는 알고 있다.
정혜신/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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