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11.22 17:49
수정 : 2005.11.22 17:49
유레카
미국영어교사협회가 매년 수여하는 ‘더블스피크상’은 “애매모호하고, 핵심을 벗어나며, 사안의 본질을 흐리는 언어”를 탁월하게 구사한 사람이나 단체에 주는 상이다. 우리말로는 ‘모호한 표현상’ ‘유해언어상’ 등으로 번역되기도 하고, ‘영어의 기형적 변형에 기여한 공로상’으로도 불린다.
이 상이 처음 제정된 것은 1974년인데, 첫 수상자는 캄보디아 주재 미국 공군 공보담당관이던 데이비드 오퍼 대령이었다. 그는 기자들에게 “여러분은 계속 폭격이라고 쓰는데 폭격이 아니라 공중지원”이라고 말한 ‘공로’가 인정돼 상을 받았다. 미국 국무부가 세계 인권현황 보고서에서 ‘살해’를 ‘불법적이거나 자의적인 생명의 박탈’로 표현한 것이나, 미국 민간항공국이 비행기 추락을 ‘제어를 벗어난 지상으로의 비행’으로, 국방부가 민간인 사상자를 ‘부수적인 손실’로 쓴 것은 아직까지도 인구에 회자되는 걸출한 수상작이다.
1차 걸프전 당시 미국 국방부는 폭격을 ‘목표물에 대한 서비스’로, 폭격의 표적이 된 인간과 건물을 각각 ‘부드러운 목표물’ ‘딱딱한 목표물’로 표현하는 기상천외한 조어능력을 발휘해 이 상을 받았다. 재미있는 것은 2003년에는 조지 부시 대통령이, 지난해에는 부시 행정부가 단체 수상자로 선정되는 등 요즘은 부시 대통령과 측근들이 상을 독점하고 있다는 점이다. 모두 이라크전 등과 관련해 애매모호한 표현으로 사안의 본질을 흐린 공로가 인정됐기 때문이다.
미국 〈에이비시방송〉은 엊그제 미국 중앙정보국이 비밀 포로수용소에서 테러용의자들에게 사용해온 구타, 물고문, 냉방고문 등 6가지의 ‘고문 기술’을 폭로했다. 포터 고스 중앙정보국장은 고문 사실을 부인하면서도 “정보 획득을 위한 특이한 방법”을 사용했다고 말했고, 미국 정부는 고문 대신 ‘공격적 심문’이라는 표현을 만들어냈다. 더블스피크상 후보로 손색이 없는 발언들이다.
김종구 논설위원
kj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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