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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1.22 18:06 수정 : 2005.11.22 18:06

이봉수 런던대 박사과정·경제저널리즘

경제전망대

유럽을 여행하다 보면 기이한 경험을 하면서 그들의 합리주의에 고개가 끄덕여질 때가 있다. 독일의 고속철 이체에(ICE)는 분기점에 이르면 열차가 둘로 나눠져 각자 다른 행선지로 향하는 경우가 많다. 교통량이 많은 대도시에서 분기점까지는 두 행선지 열차를 동시에 투입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한산한 구간에서도 높은 탑승률이 유지되고 에너지도 꽤 절약된다. 고속열차가 분기점에 이르면 대개 기존 철로를 이용하게 되는데 그래도 상당한 속도를 유지한다. 노선 직선화 공사를 해온데다 산악지대 곡선구간에서도 고속주행을 할 수 있게 좌우 경사가 조절되는 ‘틸팅(Tilting)열차’(ICE-T)를 투입하기 때문이다. 테제베(TGV)의 나라 프랑스도 신설노선은 전체 고속철도망의 20%가 안 된다. 가령 대서양선은 파리에서 대서양까지 고속철도를 건설한 게 아니라, 서울에서 대전쯤 되는 곳까지만 고속철로 위를 달리고 그 뒤에는 기존 철로를 타고 간다. 모두가 재정부담을 줄이고 수지타산을 맞추기 위한 고육지책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호남고속철 건설은 인구나 경제성과 같은 ‘기존 잣대’로만 평가해서는 안 되고, 미래의 비전과 국가 전체 발전을 위해 판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일견 합리적인 듯하지만 대통령이 해서는 안 될 말이다. 교통계획을 수립할 때 미래의 교통수요와 국토계획은 ‘기존 잣대’ 속에도 당연히 포함된다. 그런데도 대통령이 ‘비전’ 운운하면서 모호한 잣대를 다시 강조한 것은 한국적 정책결정 풍토에서 호남고속철 신설을 발표한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소신파’ 이해찬 총리가 바로 말을 바꿨고, 그 많은 국회의원 중에서도 노회찬 의원 외에는 반대 목소리가 없다. 건교부 용역 결과도 대통령 뜻을 거스르기 쉽지 않을 듯하다. 경부고속철 건설 전에도 “사업착수가 하루 늦어지면 국민경제에 66억원씩 손실을 끼치게 된다”며 노태우 대통령 선거공약을 뒷받침했던 게 관변 연구기관과 공무원의 생리다. 호남선은 좀 더 개량하면, 10조원 이상 투입되는 새 노선과 견주어 30~40분밖에 더 걸리지 않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지금도 탑승률이 41.8%에 머물고 있는데, 호남지역에는 건설중인 공항도 많아서 항공에도 승객을 많이 뺏기게 된다. 진정 호남을 발전시키려면 아직도 프로젝트로만 떠도는 대중국 전진기지와 기업도시 등을 우선 내실 있게 추진할 일이다.

고속철도 건설이 전체 지역주민들에게 과연 이익이 되느냐는 문제도 따져봐야 한다. 새마을호와 무궁화호를 3분의 1로 줄이고 통일호를 없애버린 것은 고속철의 수익을 위해 서민의 편익이 희생된 경우다. 고속철 요금구조에도 실패한 국책사업의 딜레마가 드러난다. 적자를 메우려고 요금을 몇 배로 올린다면, 승객 감소가 뻔하고 항공과도 경쟁이 안 된다. 경부고속철만 해도 20조원을 넘어설 건설비 가운데 절반 이상이 빚으로 남게 된다. 적자와 이자, 원금을 감당하려면 매년 가구당 수십만원에 해당하는 막대한 예산부담이 발생하는 것이다. 고속철 타고 다니는 부자들에게 정부와 서민들이 여비를 보태주는 꼴이다.

더 큰 문제는 “임기 중 시동을 걸어서 다시는 되돌릴 수 없도록 하겠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발상이다. 노태우 대통령은 ‘임기 중 경부고속철 착공’이라는 손쉬운 공약을 이행함으로써 정치적 이익은 최대한 누리고 다음 정권과 국민에게 부담을 떠넘긴 전례가 있다. 필자는 과거 경부고속철 착공과 관련한 칼럼에서 ‘정치적 삽질의 대가’가 얼마나 클지 예상한 적이 있다. 또 이런 속절없는 글을 쓰게 만드는 것이 한국의 정치다.

이봉수/런던대 박사과정·경제저널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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