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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1.22 18:09 수정 : 2005.11.22 18:09

김갑수 문화평론가

세상읽기

‘결국 우리들은 죽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계속된다. 슬프게도, 정말 모든 것은 계속된다, 나 없이도….’

장켈레비치라는 철학자의 글이 말하는 죽음은 ‘나의 죽음’이다. 죽음이 ‘나의 것’인 한 세상은 똑같이 말짱히 돌아갈 것이 틀림없고, 그것이 억울해서 사람들은 먼저 죽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돌연한 죽음의 행렬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인데 작금의 죽음들은 다르다. 무언가 말을 하기 위한 죽음, 설령 당사자가 원치 않았어도 무성한 말을 낳는 죽음들이다. 항의를 표하고자, 수치심을 삭이고자, 또는 억울함을 호소하고자 하는 이들 죽음의 배후는 진부한 진단이겠지만 우리 사회라는 괴물, 리바이어던이다. 따라서 이때의 죽음은 괴물에 의한 타살이며 ‘나의 죽음’을 넘어 계속되는 죽음, 즉 우리의 죽음이 된다.

하지만 세상은 우리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몰아가려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굵직한 이름들만 떠올려 보자. 정몽헌 회장, 안상영 시장, 남상국 사장, 이준원 시장, 김인곤 이사장, 박태영 지사 그리고 이제 이수일 전 국정원 차장이자 대학총장…. 이들 이름 뒤에 따라붙는 거창한 직함이 우리를 통속한 상념으로 이끈다. 그만한 위치에서 무엇이 아쉬워 목숨까지 끊는단 말인가!

생각을 건너뛰어 보자. 정작 죽어야 할 것이 있는데 죽지 않는 탓에 사람이 죽어나가는 것은 아닌가. 넬슨 만델라는 집권해서 먼저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만들었다. 그 위원회가 가차 없이 죽여버린 것은 사람이 아니라 아파르트헤이트로 상징되는 구질서였다. 심지어 만델라를 있게 한 아프리카민족회의(ANC)의 권위까지도 무참히 죽여버렸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백인도 흑인도 모두 살아남았다.

지금 거론되는 죽음의 배경에는 공통적으로 검찰 조사가 있다. 스캔들이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죽음까지 불러온 그 스캔들의 내역 앞에서 공분이 끓기보다는 어정쩡한 연민이 따르는 때가 더 많다. 북한과 거래를 트는 데, 인사청탁을 하는 데, 공사를 수주하는 데 뒷돈 거래가 있었고 사적 관계와 연고가 작용했다. 하필이면 수십년간 당연한 듯 해왔던 도청행위의 지휘선상에 있기도 했다. 훌륭하게만 살아온 사람은 분노를 터뜨리겠지만 대부분은 컴컴한 뒷거래나 부적절한 직무행위에 대해 함부로 도덕적 질타를 가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다들 그렇게 살아온 세상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지난날의 어떤 시인처럼 ‘죽음의 굿판 걷어치워라!’ 하고 외칠 용기가 없다. 다만 거듭되는 죽음들이 그들 개인의 ‘나의 죽음’이 아니라 ‘우리의 죽음’으로 인식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계속해서 살기 위해서는 먼저 죽여야 할 것이 있다는 것, 그 죽여야 할 대상은 구체적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아니라 한국인 모두에게 내면화된 어떤 적폐라는 것, 그러한 죽임이 개인적 결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거대한 사회적 기풍으로 타올라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어쩐 일인지 이번 자살 사건 앞에서 정치권의 네 탓 공방이 비교적 덜해 보인다. 각별히 민주당에 대승적 처신을 호소하고 싶다. 왜 우리 정권 때만 문제 삼느냐는 투의 반발로는 현재의 작은 그릇을 키우지 못한다. 거듭 죽음을 불러오는 사안들은 과거로부터의 적폐이자 미성장 사회의 어두운 잔영들이다. 몸집만 비대해진, 그러나 여전히 미성숙한 우리 사회를 향해 정치권이 ‘죽여야 살 수 있는’ 대국적 미래경쟁에 나서야 하지 않겠는가.

김갑수/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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