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5.11.23 20:17 수정 : 2005.11.23 20:17

김효순 편집인

김효순칼럼

신문이 자신의 주장을 담는 사설의 수는 한국의 종합 일간지들이 대체로 셋인 데 비해 일본은 둘로 굳어져 있다. 이땅에 시빗거리가 그만큼 많다는 것으로 풀이할 수도 있겠다. 일본의 유력지 〈아사히신문〉의 15일치 사설은 일왕의 맏딸 결혼식과 자민당 창당 50돌을 다뤘다. 전혀 별개 사안이지만, 지배구조에 질적인 변화가 없는 일본의 현주소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 생각된다.

전국지들은 결혼 뒤 평민으로 신분이 바뀌는 왕녀의 결혼을 축하하는 사설을 일제히 썼다. 일본의 왕실은 겉치레가 달라지긴 했어도 유럽의 왕국에서 보이는 열린 왕실이 아니다. 왕실을 관리하는 궁내청은 정부기관 가운데서도 보도규제가 가장 엄격한 축에 든다. 왕실 일가의 매스컴 접촉은 사전에 철저하게 조율되며 언론사가 정해진 ‘자숙’기준을 벗어나서 보도를 하면 즉각적인 제재가 따른다. 언론들은 일왕의 동정을 보도할 때 평어가 아닌 경어체를 쓴다.

1955년 보수 정당인 자유당과 민주당의 합당으로 출현한 자민당이 50돌을 맞은 것은 일본 정치의 긴 호흡을 보여준다. 자민당의 장기집권은 일당 독재가 확립된 나라가 아니라면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독특한 현상이다. 권위주의 체제에 저항한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 끝에 수평적, 수직적 정권교체를 이룬 우리 현실에 견줘보면 일본의 지배구조는 고착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닐 것이다.

현재의 한-일 관계가 정상회담 일정을 잡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국면을 맞은 것도 이런 맥락에서 보면 그렇게 이상한 흐름은 아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는 지난달 말의 내각 개편에서 우익 강경파들을 전면에 등장시켰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한 이웃나라들의 반발은 아랑곳하지 않고 총리 외상 관방장관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모두 참배를 하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화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차기 총리에 관한 여론조사에서 압도적 우위를 기록한 아베 신조 관방장관은 에이급 전범으로 기소됐던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의 외손자이고, 아소 다로 외상도 보수정치의 원조인 요시다 시게루 전 총리의 외손자이니 문벌로는 조금도 처지지 않는다.

사회적 유동성 측면에서 한국과 일본은 큰 차이가 있다. 오랜 기간 각 부문에서 ‘제왕학’을 배우며 권력을 세습해온 일본의 엘리트 처지에서 보면 한국의 지배구조 변화는 경망스럽기 그지없을 것이다. 내세울 가문도 없는 이들이 정치적 격변의 틈을 타 권력의 핵심에 들어앉았으니 옛날의 유착 파이프는 용도 폐기된 상태다. 오늘날 노무현 정권에 퍼부어지고 있는 비판 가운데 아마추어리즘, 인재풀 기근, 세련되지 않은 일처리 등은 새 권력층의 경험 부족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이 땅의 수구파들은 노 정권이 쓸데없는 과거청산에 집착해서 국력을 낭비하고 국론을 갈라놓고 있다고 목청을 높인다. 그러나 일본의 수구 우익처럼 자기성찰을 멀리하고 독선에 빠지면 사회 전체에 어떤 폐해가 오는지도 함께 생각해야 한다. 이달 중순 한겨레통일문화재단이 부산에서 개최한 ‘아시아의 새 질서와 연대의 모색’이란 국제학술회의에서 만난 한 일본 학자는 자민당 절대 지배로 나타난 중의원 선거 결과를 놓고 무섭다는 표현을 썼다.

거친 이분법을 쓰면 한쪽은 정체 과잉이고 다른 한쪽은 변화 과잉이다. 굳이 선택해야 한다면 당신은 어느 쪽에서 살 것인가? 숨막힐 듯한 고인 물인가, 앞이 보이지 않는 소용돌이인가?

김효순 편집인 hyoskim@hani.co.kr



광고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