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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규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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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브루투스, 너마저!” 로마 공화정 말기의 정치가인 줄리어스 시저가 심복인 브루투스의 칼에 찔려 죽으면서 내뱉은 외마디 비명이다. 한국에서 반공수구 독재정권으로부터 가장 많은 고통과 손해를 당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최근 참으로 놀라운 말을 했다. 자신의 집권 말기에 국가정보원장을 지낸 신건, 임동원씨가 한꺼번에 구속된 데 대한 반응이었다. 그는 강정구 교수의 불구속 사건을 빗대어 “한국전쟁을 통일전쟁이라 말하고 미국의 개입을 부적절하다고 한 사람에게는 관용을 베풀고, 공산당을 잡는 사람을 구속한다면 과연 사리에 맞는 일이냐”고 말했다고, 21일 그를 만나고 나온 박주선 전 의원이 전했다. 다음날 진짜로 간첩을 많이 잡은 정형근 한나라당 의원이 맞장구를 치고 나왔다. 정 의원은 이날 국회에서 열린 ‘국정원 개혁을 위한 제2차 공청회’에서 “아침 신문을 보고 놀랐다. 전직 대통령이 한 말씀이 아니면 무슨 수구세력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인가라는 말이 나왔을 것”이라며 “이제 김 전 대통령이 이런 말씀을 하시는구나 해서 대단히 마음 든든하게 생각했다”고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고, 어울리지도 않는 한쌍의 협주곡이다. 김 전 대통령이 이런 발언을 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선, 도청사건을 수사하는 검찰의 태도가 못마땅했을 것이다. 요원이 직접 음식점 탁자 밑에 녹음기를 달아놓고 행한 김영삼 정권 때의 ‘무도한 도청’은 그대로 놔두고, 내 시절의 ‘세련된 도청’만을 단죄한다고 나서다니 하고 분노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더구나 그 전날 이수일 전 국정원 차장이 자살을 해 이런 감정이 더 고양됐을 법하다. ‘국민정서법’의 논리를 따르면 이해하고도 남을 일이다. 그러나 법의 논리는 다르다. 통신비밀 보호법의 공소시효 규정을 보면 김영삼 정권의 도청은 처벌 대상이 아니다. 김대중 정권 때도 구속된 두 국정원장 재직기간만이 단죄 대상에 든다. 둘째, 김 전 대통령은 자신이 형사처벌의 대상이 되는 것을 염려했을 수 있다. 그가 매주 국정원장을 독대해 보고받았던 정보 가운데는 도청을 통해 얻은 정보도 섞여 있었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 그가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법적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자신에게 올 공격을 미리 차단하기 위해 선제공격을 가하는 것은 스포츠 세계에만 있는 일이 아니다. 셋째, 검찰도 스스로 책잡힐 일을 했다.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검찰은 강 교수를 도주 및 증거인멸 우려가 없다는 이유로 불구속했다. 그러나 그 뒤 수백억원대의 비자금을 만들어 주머닛돈처럼 빼먹은 박용성 전 회장 등 두산그룹 총수 일가를 모두 불구속하면서 일이 꼬였다. 무기까지 구형이 가능한 사람을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이라는 납득할 수 없는 논리까지 끌어대 불구속하면서 불구속·구속의 기준을 모호하게 만들었다. 모두 고개를 갸웃하고 있을 때 김 전 대통령이 절묘하게 그 틈을 파고들며 검찰을 공격하고 나선 꼴이다.이런 점을 다 이해한다고 해도 김 전 대통령의 이번 발언은 너무 지나쳤다. 그의 논리대로라면 간첩을 잡는 사람은 아무리 죄를 지어도 구속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또한 그의 말은 반공의 질풍노도 속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몸을 던져 싸워온 그의 삶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이다. ‘지역주의자로서의 김대중’이 아니라 ‘인권주의자·상대적 진보주의자로서의 김대중’을 지지해온 한 사람으로서 그에게 이 한마디를 꼭 돌려주고 싶다. “디제이, 너마저!” 오태규/사회부장 oht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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