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11.27 18:21
수정 : 2005.11.27 18:21
유레카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의 교육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곳이 1907년 평안북도 정주에 남강 이승훈 선생이 세운 오산학교다. 정부나 외국 선교기관 등이 아니라 개인이 독립운동 차원에서 조그만 시골에 세웠다는 점에서 남다른 측면이 있다. 그런데 최근 남다른 점 한 가지가 확인됐다. 현재 서울에 있는 오산고 관계자의 말을 들어보면, 분단 이후 없어진 줄 알았던 원래 학교가 그대로 있는 게 얼마 전 확인됐다고 한다. 두 개가 남북에 따로 존재하는 것이다.
남강이 학교를 세운 건, 헤이그 밀사 사건 등을 전해듣고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하다가 안창호 선생의 연설을 들은 게 계기가 됐다. 조그만 시골 학교였지만, 이 학교를 거쳐간 인물 가운데는 내로라하는 인사들이 꽤 있다. 1909년 춘원 이광수 선생이 교사로 부임해 4년 동안 가르쳤고 1915년엔 조만식 선생이 교장으로 취임했다.
평양고보를 다니다가 1921년 이 학교에 편입한 함석헌 선생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교실에 책상 걸상이 하나도 없이 마룻바닥에 앉아 공부라고 하는데 그 전 관립학교에 다니던 내 눈에는 초라해 뵈기 짝이 없었다.” 또 집이 수십채밖에 안 되는 마을에 모여든 학생이 400~500명이어서 농가의 좁은 방에 여러 명이 끼어 살았다고 한다. 누추하지만 이상한 힘이 있었는데 그건 때론 ‘호랑이’로, 때론 ‘비둘기’로 불리는 남강의 얼이었다고 함 선생은 회고했다.
남강이 1930년에 숨진 뒤에도 계속 유지되던 학교는 1947년 좌우 대립 속에 교사와 학생들이 남쪽으로 내려오는 분열 사태를 맞았다. 남쪽에선 52년 재건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지만, 북쪽 소식은 그동안 알려진 게 거의 없었다.
오산학교가 두 개 존재한다는 건 분단의 아픔을 상징하지만, 좋게 보면 남강의 독립운동 정신이 두 쪽 모두에서 이어져 왔다고도 할 수 있다.
신기섭 논설위원
mari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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