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11.29 17:33
수정 : 2005.11.29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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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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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햇발
얼굴도 본 적 없는 사람 때문에 가슴이 뛸 정도로 기뻐했던 경우를 꼽으라면 1999년 2월 장기수 강용주씨가 특사로 풀려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일 것이다. 구미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14년 동안 감옥에 있던 그는 ‘국민의 정부’가 요구한 준법서약서를 거부하고도 풀려났다.
그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98년 8월 그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덕분이다. ‘내가 준법서약서를 안 쓰는 이유’라는 제목으로 인터넷을 통해 퍼진 이 편지는 인권에 눈뜨는 계기를 마련해줬다. 특히 준법서약서가 양심의 자유 중에서도 ‘침묵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구절이 마음을 파고들었다. 편지는 이렇게 끝난다. “만기일인 2006년 9월22일까지 열심히, 건강하게 살겠습니다. 하지만 일흔셋의 당신을 생각하면 아려오는 아픈 가슴은 어쩔 수가 없네요. 어머니, 건강하게 오래 오래 사세요, 제발.”
그의 출옥 배경에 대해 당시 법무부 장관은 “국내외 인권단체의 석방청원이 쇄도했고, 형기의 상당 부분을 복역한 점이 고려됐다”고 말했다. 인권단체의 압력이 그를 구한 셈이다. 이 일을 계기로 전세계인의 인권침해 항의편지가 모이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걸 믿게 됐다. 그런데 인권단체들은 이 작업이 성공하려면 주의할 것이 있다고 한다. 상대를 비난하지 말고 정치 문제를 거론하지 말라는 것이다. 목표는 비난이 아니라 설득이기 때문이다.
인권이 정치와 무관하다는 뜻은 아니다. 지금 세계에서 인권이 쉽게 개선되지 않는 건 무엇보다 정치가 개입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자리가 유엔 인권위원회다. 지난 3월 열린 제61차 인권위원회에서 쿠바의 펠리페 페레스 로케 외무장관은 인권위가 정당성을 잃었다고 맹비난했다. 그는 “관타나모 미국 해군기지의 인권 침해 조사 결의안을 유럽연합이 지지하지 않았다”며 “이제 위선과 이중 잣대가 도를 넘어섰다”고 주장했다. 그는 “인권위가 인권 문제를 제기함에서 이중잣대를 적용함으로써 스스로의 신용을 떨어뜨리고 있다”는 내용의 한 유엔 보고서도 인용했다.
단지 쿠바의 정치 공세만은 아니다. 미국 비정부기구인 미국시민권연합도 바로 이 회의에 관타나모 기지 조사를 촉구하는 의견서를 냈다. 그리고 독립적인 전문가들로 구성된 인권위 ‘특별절차’ 참여자들은 2002년 1월부터 조사 허용을 촉구한 바 있다. 지난해 6월엔 특별절차 연례회의에 참석한 독립 전문가 전원이 공동성명을 냈고, 지난 6월에도 공동성명 한돌을 맞아 거듭 성명을 냈다. 하지만 인권 선진국이라는 미국과 유럽연합은 이를 외면해 왔다. 반면, 이들이 주도하는 쿠바·북한 등에 대한 결의안은 인권위를 통과했다. 특히 북한 인권 결의안은 지난 17일 유엔총회에서도 채택됐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다음달 10일 서울에서 보수 기독교 단체가 주관하는 북한 인권 집회가 열린다고 한다. 방식엔 결코 동의할 수 없지만 집회 자체를 탓할 생각은 없다. 강용주 같은 장기수나 관타나모 기지를 외면했다고 트집잡을 생각도 없다. 다만 북한 인권을 진정 걱정한다면 그동안처럼 태극기를 흔들지는 말길 부탁한다. 인권이 아무리 국제 정치의 도구로 전락했을지언정 우리도 똑같아서는 희망이 없다. 게다가 정치 공세로 비치는 인권 압박이 성과를 내는 일도 별로 없다. 혹시라도 북한 당국이 마음의 문을 닫아 인권상황 개선이 늦어진다면, 그건 ‘하나님’의 뜻이 아닐 것이다. 이는 똑같은 ‘하나님’을 믿는 나의 믿음이기도 하다.
신기섭 논설위원
mari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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