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12.01 18:29
수정 : 2005.12.01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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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수 베이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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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햇발
지난달 18일 럼스펠드 미국 국방장관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중국은 인민해방군 제2포병부대 유도탄 방어지휘센터를 공개했다. 럼스펠드는 한술 더 떠 중국의 ‘지하 대본영’이라 불리는 ‘시산 지하군사지휘센터’를 보자고 했다. 그는 “미국은 펜타곤을 많은 중국 군 관계자에게 공개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중국은 “시산 지하군사지휘센터에 상응하는 미국의 시설은 백악관 지하벙커와 워싱턴 북미방공지휘센터”라며 “이런 시설은 미국이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개방한 적이 없다”고 꼬집었다.
중-미 사이의 입씨름은 어떤 나라든 공개할 수 없는 핵심 군사시설이 있음을 일깨워 준다. 북한의 핵시설도 마찬가지다. 최근 베이징에서 북쪽의 한 ‘관계자’와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는 북이 지난 4차 6자회담 때 핵 포기에 동의한 건 “시산이나 백악관 지하벙커 같은 핵심 군사시설을 외부에 공개하겠다는 뜻”이라며 “북-미 사이 신뢰회복 없이 우리가 그런 치명적인 걸 공개하겠느냐”고 되물었다.
이 ‘관계자’의 설명은 6자회담이 다시 미궁으로 빠져드는 시점에서 참고할 가치가 있다. 그는 북한이 이라크전에 관해 깊이 연구했으며, 거기서 “뼈저린 교훈을 얻었다”고 했다. “개전 직후 이라크군이 즉각 궤멸한 건 미국이 1990년대와 2002년의 유엔 대량살상무기 사찰을 주도하면서 이라크의 핵심 군사정보를 완벽하게 빼냈기 때문이다. 개전 초 이라크 스커드미사일 기지의 70~80%를 파괴한 건 사찰 때 얻은 정보 덕분이다. 이라크는 바보짓을 했고 미국은 교활한 속임수를 썼다.” 이라크가 선선히 응한 사찰이 미군에 군사정보 제공 통로로 쓰였을 뿐이라고 보는 북한이 확고한 안전보장 없이 핵 폐기와 사찰에 응할 리 없다. 이 관계자는 최근 부시 미 대통령의 ‘북한 폭군’ 발언과 마카오은행 북한 창구 지급정지 조처 등을 거론하며 “지금 분위기에선 올해 말은 물론 내년 초에도 6자회담이 다시 열리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핵 문제로 10년 이상 다양한 협상과 대립을 되풀이해 온 북한과 미국은 상대의 ‘수’를 너무 잘 알고 있다. 가령 북의 관계자는 “북-미 수교까지 핵 폐기 이외에도 인권, 마약, 위조지폐, 대량살상무기 등 적어도 네 가지 산을 더 넘어야 함을 북도 잘 알고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한반도 문제 전문가 셀리그 해리슨은 “북핵 문제는 회전문과 같다”고 말한다. 회전문을 계속 잡고 있으면 안(북-미 수교)으로 들어가는 듯하다 밖으로 나오고, 또 밖(전쟁)으로 나오는 듯하지만 다시 안으로 들어간다. 현재의 사태 전개는 회전문이 다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4차 6자회담에서 북·미 두 나라는 각각 핵 폐기와 관계 정상화를 약속했지만, 예상했던 대로 미국은 인권과 위조지폐 문제를, 북한은 경수로 문제를 들고 나와 회전문을 다시 돌아가게 만들었다.
세계 최고 문명국임을 자랑하는 미국은 지금까지 실망스럽게도 전쟁 대신 지혜로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을 거의 보여주지 못했다. 우등생이라면서 걸핏하면 주먹다짐으로 문제를 푸는 셈이다. 북한이 이라크 전쟁에서 교훈을 얻었듯 미국도 거기서 교훈을 얻어야 마땅하다. 전쟁도 피하고 회전문의 순환도 피하는 길은 정치적 결단밖에 없다. 미국이 내릴 수 있는 최고의 정치적 결단은 과거 클린턴 대통령이 추진했던 것처럼 최고 지도자의 방북을 통해 반세기 묵은 불신을 털어내는 일이다. 이런 지혜를 발휘할 때 미국은 지금까지 세계 도처에 쌓아온 오만의 바벨탑을 허물 수 있을 것이다.
이상수/베이징 특파원
lees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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