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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2.04 20:51 수정 : 2005.12.04 20:51

서민 단국대 교수·기생충학

야!한국사회

할머니를 댁에 모셔다 드리고 오는 길, 한강다리를 건너는데 왼쪽 차로를 달리는 차의 창문으로 개 한 마리가 고개를 빼고 있다. 답답한 실내에서 벗어나 바깥 공기를 쐬고 있는 중이거나, 세상 구경을 하면서 견문을 넓히고 있는 것일 게다. 개 주인은 행여 개가 추울까봐 따뜻한 옷을 입혔고, 옷 아래 윤기나는 털이 바람에 날린다. 아마도 그 개는 사랑받을 것이다. 먹이와 물은 언제나 가득하고, 녀석이 하는 일이라고는 재롱을 피우거나 잠을 자는 게 고작일 것이다. 그에게 세상은 언제나 따스하고 아름다운 곳이다.

흐뭇한 표정으로 녀석을 바라보며 네거리를 건너던 중,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아아------------악!”

한 5초가량 비명을 질렀던 것 같다. 도로에 개 한 마리가 내장을 내놓은 채 죽어 있었다. 그 개는 필경, 건널목도 없는 8차선 도로를 무단 횡단하다가 변을 당했을 것이다. 자신이 있는 곳이 영 마땅치 않아서, 마실 물도, 마땅히 먹을 것도 없었기에, ‘길 건너의 세상은 이곳보다 낫겠지’라는 생각에서, 쌩쌩 달리는 차를 피해 반대편으로 가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개는 모르고 있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건너편에 가봤자 상황은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것을. 서울이란 도시는 버려진 개들에게 지극히 냉담하여, 그 개가 편안히 안식을 취할 곳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종자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한다 해도, 두 개의 운명은 너무도 틀렸다. 가족 모두한테서 사랑받으며 삶을 즐기는 흰 개, 그리고 수명을 채우지도 못한 채 차도에서 죽어간 검은 개. 그 검은 개 역시 주인만 잘 만났다면 얼마든지 귀여운 척 재롱을 피울 수 있을 터였다. 그래서 검은 개는, 죽는 순간 이렇게 억울함을 호소했을지 모른다.

‘쟤가 나보다 나은 게 뭔데? 우리 둘의 삶은 왜 이렇게 틀린 건데?’

사람이라고 별로 다를 건 없다. 축복 속에 태어나 어릴 적부터 호의호식을 하는 애가 있는 반면, 태어나자마자 내버려지는 아이도 있다. 부잣집 애가 세상은 사랑으로 충만한 아름다운 곳이라고 생각하는 반면, 버려진 아이는 따뜻함이 뭔지도 모른 채, 인생은 처절한 싸움이라고 생각하며 앵벌이에 나설 것이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역전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고, 십년 뒤, 이십년 뒤의 자기 모습을 그리는 부자집 애와 달리, 후자의 아이는 오늘 먹을 양식을 걱정하며 살아야 한다.

인생이 단 한번 사는 것이라면, 어떤 줄을 잡고 태어나는가에 따라 인생이 좌우되는 것은 너무도 불공평하다. 가진 자들은 ‘열심히 하면 성공한다’는 신화를 열심히 유포하지만, 명문대 진학률과 부모의 소득이 정확히 비례한다는 통계에서 입증되듯, 몇몇 특이한 경우를 제외한다면 계층은 대물림되기 마련이다. 국가가 그 불공평을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되어 주면 좋겠지만, 우리 정부는 그런 것에는 별반 관심이 없어 보인다. 빈부격차를 내세워 정부를 공격하던 언론들은 난데없는 ‘복지병’ 타령을 하며 형식적인 복지마저 가로막으려 애쓴다. 한국에서 살아가는 게 힘든 이유는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가진 자들을 끌어내리려 해서’가 아니라, 못가진 자들을 짓밟는 사회구조 탓이다. 지금부터라도 빈곤층에 대한 대책을 세우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에 희망은 없다.


서민/단국대 의대 교수·기생충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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