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12.08 18:33
수정 : 2005.12.08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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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영 한신대 국제관계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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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추운 겨울 자식뻘 전경에게 농민이 맞아 죽는 나라를 누구도 정상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마치 주차위반 딱지 끊듯이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대상국이 늘어나도 왜 하는지, 과연 실익이 있는지 누구도 모른다. 요식행위에 불과한 청문회에서도 이해당사자의 목소리는 별로 들리지 않는다. 한국 통상정책의 실태와 비교해 그것이 미칠 결과는 거의 치명적일 수 있다. 현대판 자유무역협정은 과거 신발 팔고, 가발 팔던 시절의 ‘통상’과는 그 포괄범위에서 아예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지금 이대로 가서는 안 된다.
우리의 헌법에서 시작해 보자. 헌법 61조1항을 보면 국회는 ‘국가나 국민에게 중대한 재정적 부담을 지우는 조약’의 ‘체결·비준에 대한 동의권’을 갖는다. 반면 대통령은 ‘조약의 체결·비준권’을 행사(헌법 73조)한다.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은 ‘중점’(·)의 의미이다. 다시 말해 헌법은 국회가 예컨대 통상관련 조약의 ‘체결’과 ‘비준’ ‘각각에’ 대한 동의권을 행사하도록 규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우리 헌법이 ‘체결’과 ‘비준’을 각기 구분해서, 법률적으로 서로 다른 행위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헌법 61조, 73조의 조약의 ‘체결’이라 함은 “좁은 의미의 그것으로 전권대표의 지명·파견, 조약 내용에 대한 기본방침 지시 등의 뜻”(허영 〈한국헌법론〉 172쪽)으로 해석함이 마땅하다. 여기에 ‘조약법에 관한 빈협약’을 인용해 본다면 우리 헌법상 조약의 ‘체결’이란 전권대표의 임명에서 협상, 협상완료 및 서명(조인)까지의 과정을 일컫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첫째, 헌법이 규정한 체결과 비준에 대한 별개의 국회동의권은 사실상 비준‘만’에 대한 동의권으로, 다시 말해 ‘반쪽’ 동의권으로 이해되어, 실제로 그렇게 시행되어 왔다. 둘째, 이 ‘반쪽’ 동의권마저도 ‘기명조인 전’에 행사되어야 함에도 사실상 사후승인으로 전도되어 있다.(권영성, 〈헌법학 원론〉, 838쪽 참조) 셋째, 헌법 61조, 73조의 입법취지가 대통령(행정부)에 대한 입법부의 ‘민주적 통제’에 있음을 상기할 때 이런 현실은 국회 스스로 삼권분립이라는 헌법상의 책임을 방기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에 다름아니다.
따라서 현재의 ‘국회비준동의안’ 처리 관행의 위헌 여지를 불식하고, 협상전권대표의 임명에서 조약에 대한 기속적 동의, 곧 서명단계에 이르기까지 국가외교상의 ‘입법 불비’ 상황을 타개할 필요가 제기된다. 또한 헌법 61조의 본래적 입법 취지인 행정부에 대한 입법부의 ‘민주적 통제’는 강화되어야 한다. 이런 취지에서 양대 노총, 전농, 영화인 대책위 등을 비롯한 10여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통상조약 절차법 제정 연석회의’는 1년여에 걸친 공동작업을 거쳐 ‘국제통상조약 체결절차 등에 관한 법률안’(통상절차법)을 민주노동당과 공동 발의하였다.
그 주요 내용은 무엇보다 통상조약 체결 과정의 투명성과 전문성을 확보하고, 농민, 노동자, 중소기업 등 조약상 이해당사자의 발언권과 참여를 대폭 보장하며, 협상과정에 대한 국회의 통제권을 엄밀히 하고 정보공개, 청문회 등 지금까지 사실상 유명무실한 제도들의 실질을 기하며, 협정으로 인한 피해 업종에 조정지원을 법제화하는 것이다.
두루 아는 것처럼 세계화의 역기능 가운데 으뜸은 다름 아닌 사회적 양극화이다. 세계화의 이름 아래 진행되는 자유무역협정이 공론화 과정조차 없이 진행되면 한국사회를 더욱더 양극화로 내몰 것이 자명하다. 이것이 통상절차법을 재촉하는 가장 긴급한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이해영/한신대 국제관계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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