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12.08 18:36
수정 : 2005.12.08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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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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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햇발
세상이 정말 ‘글로벌 시대’로 바뀌었음을 실감하는 요즘이다. 최근 뉴스의 초점이 된 황우석 교수 문제를 둘러싼 언론 보도를 보면서 받는 느낌이다. 뉴스의 공급처부터 가히 세계적이다. 서울·피츠버그·런던·도쿄·싱가포르 …들이 종횡으로 얽히고설킨다. 제럴드 섀튼, 도널드 케네디 등 이름도 까맣게 몰랐던 각국 전문가들이 매일같이 언론에 오르내리는 주요 기사 공급원으로 자리잡았다. 용어도 이해하기 힘든 첨단과학 문제를, 그것도 국제적으로 복잡하게 얽힌 사안을 용케도 취재하는 후배 기자들에게 존경심마저 들 정도다. 그리고 때로는 조마조마한 느낌도 든다. 이제 자칫 기사 한줄 잘못 쓰면 국제소송에 걸리지 말라는 법도 없기 때문이다.
글로벌 시대에는 당연히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것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번에 확인된 글로벌 스탠더드는 자명하다. 굳이 글로벌이라는 말을 붙일 것까지도 없다. 그것은 결과 못지않게 과정이 중요하다는 만국 공통의 진리에 대한 재확인이다. 성취의 과녁에 이르는 길이 떳떳하고 공정해야 한다는 당위적 명제에 대한 뼈아픈 울림이다.
과학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처지에 과학계의 국제기준을 용훼할 처지는 못 된다. 다만 언론 문제에 대해서는 언론계의 한 귀퉁이나마 차지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만감이 교차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자신을 부끄럽게 돌아보고 반성한다. 정도에서 일탈한 방식의 취재는 오랫동안 언론계에서 부끄러움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자랑의 원천이었다. 경찰관이나 검사 등을 사칭해 취재에 성공했다든가, 불법으로 남의 집에 몰래 침입해 ‘한건’을 올렸다는 따위는 술자리에서 영웅담으로 떠벌려지곤 했다. 특권의식과 한탕주의에서 자유롭지 못했음도 솔직히 고백한다. 그래서 ‘피디 수첩’에 쏟아지는 질책은 비단 피디 수첩만의 것이 아니다. 어제의 재판관에서 오늘 피고인석 자리로 내려앉은 것은 언론계 모두다.
부끄러움은 내면에 흐르는 눈물이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언론계 어디에서도 부끄러움에 흘리는 눈물은 보이지 않는다. 내면적인 자기 성찰과 반성 대신 외부를 향한 날선 공격의 화살만이 난무할 뿐이다. 흥분의 소용돌이 속에서 긴 숨결의 평상심은 이야기되지 않는다. 매질과 관대함의 불균형은 ‘왜’라는 물음마저 ‘반대’로 오도한다. ‘새로운 종교’에 경배하지 않는 무리는 한낱 이교도들일 뿐이다. ‘사실관계’에 대한 궁금증마저도 이념의 문제로 치환되는 오늘이다.
혹자는 ‘피디 수첩’의 검증 작업을 두고 ‘분수’를 말한다. 과연 언론 따위가 과학적 업적을 검증할 자격이나 갖추었느냐는 비아냥이다. 맞는 말일 수 있다. 분수는 오만과 허영에 대한 자기억제다. ‘피디 수첩’이 오만과 과욕에서 자유롭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비난을 과학계가 아닌 언론계 스스로 제기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언론의 생명인 ‘회의와 의문’의 정신마저 빈정거림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것은 언론의 자기부정이다. 오만과 자긍심을 혼동해서도 안 된다.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말이 있다. 참다운 국제성은 지역적인 냄새가 물씬 나는 국지성을 띤다는 의미에서다. 하지만 오늘 이 땅에서 나타나는 보도 양태는 참다운 국제성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선진언론이라면 마땅히 갖추어야 할 기준과도 한참 동떨어져 있는 특이한 한국적 현상일 뿐이다. 각 분야에 국제화 시대에 걸맞은 기준을 세우자고 외치면서도 현실에서는 역주행으로 치닫는 현상, 이것이 우리 앞에 놓인 비극이다.
김종구 논설위원
kj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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