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12.11 17:44
수정 : 2005.12.11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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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 교수·만화창작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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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한국사회
날카로우면서 슬픔이 담겨 있는 눈. 더벅머리. 아무도 믿지 못하는 상처받은 마음. 선천적으로 타고난 주먹 솜씨. 무모할 정도의 자신감. 여자를 반하게 만드는 묘한 반항아의 매력. 만화나 영화를 주름잡던 주인공들의 익숙한 공통분모들이다.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도전자〉(박기정)의 주인공 ‘훈이’가 있고, 70년대에는 〈아홉개의 빨간 모자〉(이상무)의 주인공 ‘독고탁’이 있으며, 80년대에는 〈공포의 외인구단〉(이현세)의 주인공 ‘오혜성’이 있고, 90년대에는 〈남벌〉(이현세)의 주인공 또 다른 ‘오혜성’이 있다. 만화 안에서 이들은 그늘진 얼굴을 한 고독한 주인공이었다. 사랑을 하는 것은 물론 받지도 못했다. 깊게 팬 내면의 상처는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외골수의 성격을 만들었다. 〈도전자〉의 주인공 훈이와 〈남벌〉의 주인공 오혜성은 무려 30년의 시차를 둔 복제인간처럼 보인다. 훈이는 일본인이라면 무조건 싫어하고 증오한다. 오혜성도 마찬가지. 그리고 둘은 모두 일본 최고의 실력자들과 겨루어 그들을 굴복시킨다. 훈이는 사각의 링에서 일본인들을, 혜성은 한일간의 전장에서 일본인들을 거꾸러뜨린다. 〈아홉개의 빨간모자〉의 독고탁과 〈공포의 외인구단〉의 오혜성이 보여주는 분노와 상처도 닮은꼴이다. 둘은 가난하며 혼자다. 그러다가 마음을 기댈 사람(독고탁은 봉구, 오혜성은 엄지)을 만나고, 야구를 하게 된다. 하지만, 마음을 주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했다고 생각하고 난 뒤 둘은 급속도로 피폐해진다. 야구공을 쥐고 유리창을 깬 독고탁의 눈이나, 마동탁의 타구를 잡지 않고 얼굴에 맞는 오혜성의 눈은 붕괴된 자아의 표상이다.
90년대 중반 이후 ‘쿨’한 주인공이 나오기 전까지 우리 대중문화를 주름잡은 스타들은 이처럼 분노로 점철된 상처투성이의 인물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내부에 잠재된 소외와 불만, 공포와 같은 복잡하고 거대한 상처를 주로 스포츠를 통해 외부로 폭발시켰다. 훈이와 독고탁과 오혜성에게 스포츠는 상처를 해소하는 씻김굿이었다. 우리는 이들의 진혼을 보며, 대리만족을 하곤 했다. 60~80년대의 힘겨운 시간을 이들의 분노와 함께 했다. 〈열혈강호〉의 한비광이나 〈슬램덩크〉(비록 우리 만화는 아니지만)의 강백호가 상처뿐인 내면의 영웅 오혜성을 대치하고 난 뒤, 과장된 상처를 안은 주인공과는 이제 안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이상하게 반대로 돌아간다. 60년대 만화에나 나왔음직한 분노와 적대감이 가득하다. ‘다꾸앙’은 무조건 싫다며 적대감을 드러내는 그늘진 눈이 ‘국익’이나 ‘연봉’에 번득인다. ‘국익’이라는 두 글자에 무력한 우리는 다른 목소리를 듣지 않는다. 농업문제나 황우석 박사 사건이나 모두 마찬가지다. 돈과 관련된 비교우위로 모든 것을 판단한다. ‘고액연봉(이라고 표현된) 노동자’들의 파업을 보는 적대적 눈총도 마찬가지다. 〈도전자〉의 훈이나 〈남벌〉의 혜성이 ‘일본’이라는 국가체제와 개인인 ‘일본인’을 구분하지 못하고, 일본인 모두를 다꾸앙이니 게다짝이니 하며 적대시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노동자들을 다른 기준으로 지배하는 자본의 방식에 대해 분노하지 않고, 돈의 차이에 분노한다. 훈이의 왜곡된 분노는 권투와 어머니의 사랑을 통해 해소되었다. 오늘 우리의 분노는 도대체 무엇으로 해소될까. 막막하다.
박인하/청강문화대 교수·만화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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