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12.13 18:41
수정 : 2005.12.13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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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병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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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햇발
독일의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는 자신의 묘비명에 이렇게 썼다. “생각하면 할수록 놀라움과 경건함을 주는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내 위에서 항상 반짝이는 별을 보여주는 하늘이며, 다른 하나는 나를 항상 지켜주는 마음속의 도덕률이다.” 세상은 “하늘엔 빛나는 별, 내 마음엔 도덕률”로 간추려 쓴다.
칸트는 세계를 순수이성의 영역과 실천이성의 영역으로 구분했다. ‘하늘의 별’은 신이 자연에 부여한 필연의 법칙에 의해 움직이는 자연계를 상징한다. 당시 이 법칙은 뉴턴 물리학으로 완벽하게 설명될 수 있다고 믿어졌다. 칸트는 인간의 행위도 이처럼 ‘완벽하게’ 설명하려 했다. 그 열쇠가, 우리의 행위를 결정하는 우리 본성 안의 어떤 것, 곧 도덕률이다. 칸트에게 ‘도덕은 인간 본성의 표현’이었기에 인간의 도덕적 행위는 강제된 것이 아니라 자유 그 자체라고 생각했다.
산업화와 함께 대중 민주주의가 확산되면서 공리주의가 윤리학에서도 영향력을 넓혀갔다. 공리주의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원리에서 드러나듯 결과로 행위의 정당성을 판단한다. 더 많은 이들에게 더 많은 덕을 주면, 그 행위는 도덕적인 것으로 인정된다. 때문에 공리주의는 다수의 이익을 위해 소수의 자유를 억압하고, 결과로써 수단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기도 했다.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생체 실험을 자행하던 의사나 과학자들은 더 많은 사람의 복지를 위해, 죄수 포로 혹은 ‘쓸모없는 존재들’을 생체 실험에 이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철학자 존 롤스가 정의에 관한 칸트의 명제를 복원시켜 ‘옳음이 좋음보다 선행한다’고 선언한 것은 이런 비인간화의 흐름 속에서였다.
그러나 칸트와 달리 롤스가 보기에 개인적인 결정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너무 많아졌고, 사회가 복잡해졌다. 윤리학은 도덕적으로 자율적인 개인을 설명하고 정당화하는 데 매달려 있을 수 없었다. 인간 중심에서 벗어나 자연과 다른 생명 전체로도 확장돼야 했다. 실제로 윤리준칙을 확립하려는 노력은 과학·종교·법률·언론·정치·기업·환경·교육 등 각 집단으로 확산됐다. 성격은 다르지만 이들이 근거하는 도덕적 명제는 같았다. 옳음이 좋음에 선행된다는 정의의 원칙이 그것이다. 매매된 난자 사용금지 규정이나, 상급자의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연구원의 인체 실험 금지 규정은 물론 가치가 아무리 큰 정보라 해도 인권 침해로 얻어진 것이라면 증거능력을 인정받을 수 없다는 언론이나 법률기관의 준칙도 여기에 근거한다.
올해 들어 한국사회를 뒤흔든 문제들은 각자가 따라야 할 윤리를 무시한 데서 비롯됐다. 두산그룹 회장 일가가 짓밟은 기업 윤리, 홍석현 중앙일보 전 회장이 유린한 언론 윤리 등은 대표적이다. 적잖은 사학재단이 교육자로서 윤리를 저버리고 배임·횡령·전횡을 일삼다가 역풍을 맞은 것도 좋은 실례다. 황우석 교수 연구팀은 그 걸출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올바름을 지키지 못해 치명적인 논란에 휩싸였으며, 피디수첩은 취재 결과의 공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수단의 부당함으로 인해 낭패를 당했다.
이런 사태는 승자 독식의 고도성장 사회가 빚어냈다. ‘더 많이’ ‘더 빨리’를 지상과제로 삼았으니, 행위는 결과로써 평가되었다. 정당성, 곧 옳음은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다. 이제 올해도 얼마 남지 않았다. 별 헤아릴 때의 경이로움으로 우리 안의 도덕률을 돌아보자. 그것은 나와 우리를 옳음으로 이끌어, 우리의 존엄을 지켜주는 별 구실을 할 것이다.
곽병찬 논설위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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