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12.18 19:47
수정 : 2005.12.19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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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철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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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철의법과세상
임진왜란 때 선조가 도성을 버리고 의주로 도망하자, 노한 백성들은 왜군이 들어오기도 전에 궁궐에 불을 놓았다. 수천년 왕정을 거친 백성이었는데도, 해방 직후 좌우대결은 심했지만 왕정복고의 목소리는 없었다. 백성을 배신하고 망국을 초래한 무능한 왕조에 대해 한없이 실망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1950년 ‘서울을 사수한다’는 육성방송을 하던 이승만 대통령은 이미 대전에 도망가 있었고, 명령에 따라 한강다리를 폭파한 군인은 총살됐다. 1980년 광주에서 계엄군은 ‘시내 진입을 하지 않는다’고 방송한 뒤 비무장시민들을 무차별 살상하며 기습진압작전을 감행했다. 이후 통수권자가 된 전두환 장군은 5년 동안 무려 1조원대의 뇌물을 수금한 것이 드러났다.
권력자들에게 한없이 배신당해온 국민은 그들에게 더 이상 실망할 일도 분노할 일도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적어도 과학자들에겐 그렇지 않았다.
엊그제 황우석 서울대 교수가 기자회견을 하며 ‘인위적 실수’라는 새로운 말을 만들어 냈다. 정치가나 외교관이라면 모를까, 과학자의 입에서 나올 만한 말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외교적 질병’이란 외교관이 불편한 자리를 피할 때 흔히 병을 칭하는 것을 말한다. 외교상으로는 관행적으로 용인되는 일이라 이를 두고 거짓말이라 비난하지 않는다. 30대에 주검찰총장을 거쳐 40대에 미국 대통령이 된 빌 클린턴이 어린 인턴사원과 불륜을 시인할 때 ‘부적절한 관계’라는 절묘한 용어를 만들어냈다. 그는 정치인이자 변호사였다.
과학자인 황 교수로서는 “욕심이 과한 나머지 논문조작이라는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시인했어야 했다. 또 다른 사람에 대해 수사 요청할 일이 아니라, 스스로 검찰에 나가 범행을 신고해야 했다. 그나마 그것이 국민적 영웅으로 대접받은 데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
줄기세포의 유무를 떠나 ‘인위적 실수’로, 세계를 상대로 논문을 조작하여 온 백성을 부끄럽게 하고, 국가신인도 추락으로 막대한 국익 상실을 초래하고, 수백억원의 국고를 우연히 개집에서 날아든 일개 곰팡이 때문에 날린 그는, 그의 고백대로라면 희대의 사기범(인위적)이거나 세기의 과실범(실수)임에 틀림없다.
범죄수사가 직무인 검사가 기업인인 양 경제를 생각하고 기업인은 정치인인 양 나라 일을 걱정하더니 마침내 과학자마저도 그 곡학아세가 정치인인지 사기꾼인지 잘 모를 정도가 됐다. 우울하다.
김용철 변호사
kyc0327@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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