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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2.19 18:09 수정 : 2005.12.19 18:09

도종환 시인

도종환칼럼

소리 없이 눈이 내린다. 소복소복 내려 쌓인다. 올 겨울엔 눈이 자주 온다. 산수유 빨간 열매 위에 스치듯 내려앉는 하얀 눈이 곱다. 목련 나무의 딱딱한 열매를 부리로 쪼다가 산수유나무로 날아와 눈에 씻은 빨간 열매를 따먹는 새들의 머리털이 까칠하다.

한 해가 가고 있다. 아는 수녀님이 수도회에서 만든 달력을 보내주셨다. 달력을 넘기다가 좋은 시를 읽었다.

“꽃밭을 그냥 지나쳐 왔네 / 새소리에 무심히 응대하지 않았네 / 밤하늘의 별들을 세어보지 않았네 / 친구의 신발을 챙겨주지 못했네 / 곁에 계시는 하느님을 잊은 시간이 있었네 / 오늘도 내가 나를 슬프게 했네”

돌아가신 정채봉 선생의 ‘오늘’이라는 시이다. 한 해를 너무 정신없이 보냈다. 아니 하루하루를 정신없이 보낸다. 아름다운 걸 아름답게 바라보지 못한 채 지나쳐 가고, 귀담아 들어야 할 소리들을 제대로 듣지 못하고 산다. 낮달이 해사한 은빛 얼굴로 산 위에 솟아올라 있어도 무심히 지나쳤다. 마당에 켜 둔 등불 아래로 몰려오는 싸락눈을 오래 바라보지 못하고 밀린 일거리 때문에 들어와 버렸다. 빈 가지마다 눈꽃을 피우고 서 있는 겨울 숲의 나무들 곁으로 한 발 더 다가가지 못하고, 약속 시간을 맞추느라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우리들은 너무 들떠서 산다. 정보화 사회가 가져다 준 신속성, 현장성, 쌍방향 소통성은 글 한 줄을 써도 반응이 즉시 오고, 짧은 시간에 많은 여론을 형성하는 힘은 있지만 그 대신 가볍고 깊이 없는 세상을 만들고 있다. 거기다 신문과 방송이 큰 활자로 던지는 대형 사건의 쓰나미는 일주일 열흘이 멀다고 사람들을 흥분한 채 살아가게 만든다. 차분하게 사실을 확인하고 생각한 다음 진실한 글과 말을 전해야 하는데 언제나 놀라게 하는 방식으로 다가온다. 검증도 해 보지 않고 시장의 이해관계에 따라 글을 쓰거나 편향된 이념을 토대로 선입견이 들어가 있는 글을 써 댄다. 그런 기사와 칼럼을 읽고 맹목적 애국심으로 사이버 공간을 몰려다니며 욕을 해대는 천박함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지금 우리 시대의 특징이 되어 가고 있다.

자성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직해야 한다. 자기 자신과 과학적 진리와 사회적인 책임 앞에 정직해야 한다. 글 쓰는 사람과 언론과 지식인도 정직해야 한다. 지금까지 영웅을 만들어온 것도 언론이고 영웅을 쉽게 버리는 것도 언론이었다. 영웅과 우상을 만들기 전에 진실해야 하고 깊이 있게 사유하고 검증해야 하며, 영웅을 버리기 전에 사람에 대한 신뢰와 애정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충격도 성과주의, 조급주의, 정직하지 않은 일처리가 불러온 부실이라는 점에서 보면 성수대교가 붕괴되고 삼풍백화점이 무너질 때와 큰 차이가 없다. 그래서 더욱 차분해지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하며, 정직하고 성실하게 쌓아가는 전문성이 필요하고, 오래 지켜보고 기다리며 믿어주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냉동된 진실이 서서히 녹으면서 한 해가 가고 새해가 올 것이다.

내리는 눈도 바라보며 살자. 아름다운 꽃을 그냥 지나치지 말고, 챙겨주어야 할 이웃의 신발도 생각하며 살자. 내 곁에서 나와 함께 계시는 분이 누구인가 생각하며 살고, 내가 나를 슬프게 하지 말고 살자.

도종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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