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12.22 17:59
수정 : 2005.12.22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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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희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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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가끔, 너무 일찍 온 것들은 새롭고 낯설다는 이유로 푸대접 받는다. 식민시대 신여성들의 여성관은 바로 지금의 21세기 초보다도 더 개방적이고 더 급진적인 구석이 있는데, 그렇게 1세기쯤 앞질러 태어난 만큼 푸대접 정도가 아니라 희생양의 운명을 맞기도 했다. 요즘 인혁당재건위·민청학련 등 과거사에 대한 진상조사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군사독재가 아직 10~20년쯤 더 남았음에도 겁 없이 민주화운동을 조직했던 이들 역시 너무 일찍 피어 서리를 맞은 봄꽃이었던 셈이다. 1980년대 초 김지하씨가 생명사상을 이야기하기 시작했을 때 당시 ‘운동권’에서는 시쳇말로 ‘김지하, 맛이 갔다’고 엑스표를 그었다. ‘80년 광주’ 직후였고 군사정권 치하였고 민주화가 당면과제인 시절이었으니 이런 반응은 당연했다. 하지만 그가 양극화를 넘어 상생을 이야기하고 물신주의를 넘어서 생명을 이야기한 것은, 뒤늦게 생태환경이나 정신건강의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한 한국 사회의 진도를 10년쯤 앞질러 온 셈이었으며, 당시의 그가 ‘푸대접 받는 선지자’였다는 게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피디수첩’이 황우석을 둘러싼 의혹을 보도하겠다고 했을 때 황우석은 일견 고향에서 시기심에 가득 찬 동족들에게 수난을 당하는 선지자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직도 그렇게 믿고 싶어 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지난 2년간 이 선지자의 위용에 압도됐던 한국 사회는 지금 집단최면에서 깨어나느라 어수선하다. 나 역시 최면에서 깨어나는 데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불과 며칠 전까지 ‘60%의 연구 업적에 40%의 과장과 조작이 있었던 것 아닐까. 그렇다면 60%는 살려야 하는 것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기대조차 무너지고 난 다음이다.
황우석은 생명공학이라는 첨단과학-미래산업을 둘러싼 판타지로 한국 사회에 하나의 신드롬을 만들어냈지만 사태의 본질은 구태의연하기 짝이 없다. 근사한 판타지의 프로듀서인 황우석이나 거기에 열광한 대중이나 모두 어떤 조급증과 업적주의의 희생양이다. 그것을 개발도상국 증후군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고도성장-압축성장의 30년은 물질적 풍요를 가져왔지만 그 과정이 드라마틱했던 만큼 우리 사회 전체가 집단 무의식에 있어 지각변동에 가까운 변화를 겪었다. 이제 한국은 공식적으로 개발도상국 단계를 벗어났고 이른바 선진국그룹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맹국이 되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가파른 산업화의 언덕을 씩씩대며 올라가던 시절의 생체리듬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다. 빨라야 한다는 속도 강박, 뭔가 소용 있는 일을 하고 있어야 한다는 생산성 강박,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일단 업적을 내고 봐야 한다는 업적 강박. 아무리 빨라도, 일을 해도, 업적을 내도, 해소되지 않고 그대로 남는 것이 ‘강박’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잘 하든 잘 못하든 간에 크게 작게 욕구불만과 좌절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이 집단적인 욕구불만은 늘 출구를 찾기 마련인데, 그 중 하나가 소속집단, 또는 국가를 통한 대리만족일 것이다. 황우석 신드롬의 강도는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집단 스트레스의 강도를 반영한 것 아닐까.
한 가지 다행은, 문제를 제기하고 조사를 하고 규명해내는 과정을 국내에서 주도했다는 점이다. 혹시, 우리가 덮어뒀으면, 쉬쉬하고 넘어갔으면, 세계 줄기세포 연구와 생명공학 산업의 메카가 되어 현재의 정보통신산업을 능가하는 경제적 부가가치를 한국이 선점하게 되지 않을까, 세계를 감쪽같이 속일 수도 있을 텐데 미리 터뜨려서 국익에 도움이 될 게 뭐냐는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개발도상국 증후군에서도 심각한 중증이다.
조선희/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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