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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구암고 교사 나는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공약 ‘고교서열화 완전 해소-외고·자사고·국제고의 일반고 전환’의 지지자다. 다행스럽게도 이 공약은 정치권의 합의 수준이 높다. 그것은 유승민 후보와 심상정 후보의 공약이었고, 취지만 보면 안철수 후보의 공약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나와 같은 공약 지지자들은 희망을 가질 만했다. 그러나 이 공약은 문재인 정부 출범 초에 실패가 예정돼 있었다. 정부(대통령 직속 국정기획자문위원회)가 잘못된 이행전략을 발표했을 때 공약은 이미 좌절된 것이었다. 어떤 전략이었나? 첫째는 외고·자사고의 학생선발 시기를 일반고와 일치시키는 것, 둘째는 교육감의 재지정 평가를 통해 이들을 일반고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첫째 전략을 보자. 이것은 학생들의 외고·자사고 지원을 곤란하게 만들어 이들 학교의 인기를 떨어뜨리는 전략이다. 그런데 선발 시기 조정만으로 효력이 있을까? 거의 없다. 그래서 추가된 것이 외고·자사고 지원자의 일반고 지원 금지 조치다. 어떻게 됐나? 파산했다.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을 받았다. 헌법재판소를 탓할 일이 아니다. 애초에 정부의 금지 조치 자체가 어린 학생들을 지나치게 난처한 상황으로 몰아넣는, 도저히 문재인 정부의 정책이라 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둘째 전략은 어떤가? 만약 시행된다면 이 또한 실패할 것이다. 전국의 외고·자사고·국제고가 대략 80개다. 교육감의 재지정 평가를 통해 이들 학교 전부를(전부가 아닌 상당수라 할지라도) 일반고로 전환하는 건 애초에 무리가 있다. 교육감의 지정 취소권을 공약 이행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 법령 취지에 맞는 것인지, 이후의 법적 분쟁에서 승리를 보장할 수 있는 것인지 등의 문제를 차치해도 여전히 문제가 남는다. 이것은 잘못된 제도와 문제가 된 법령을 표적으로 삼는 게 아니라 개별 학교와 그 구성원을 표적으로 삼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외고·자사고 구성원에게 심각한 모욕감을 주어 분노와 증오를 과도하게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또 이것은 국민의 마음을 얻기 어려운 전략이다. 이것이 실제 현실에서 실행되면 그 과정이 국민에게 어떻게 보일까? 고교서열화를 가져온 잘못된 제도를 바로잡는 과정이 아니라 개별 학교 하나하나에 대한 처벌 과정으로 보일 수도 있다. 게다가 이 전략은 자칫 재지정 평가를 통과한 학교들에 면죄부를 주어 고교서열화 해소라는 문제의 본질을 흐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고교서열화와 고교 입시 문제는 재지정 평가 점수가 낮은 학교 때문에만 발생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평가 점수가 높은 학교로 인해 더 많이 발생한다. 정부는 애초에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았을까? 법령 개정을 통해 외고·자사고·국제고를 (시간적 여유는 충분히 갖지만) 한꺼번에 일반고로 전환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초중등교육법 시행령 90조, 91조의3 등의 개정이 핵심이다. 현실적인 부담이 너무 크다면? 이들 학교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선발방식만 바꾸는 방법이 있었다. 즉 학생 선발을 일반고처럼 오로지 추첨으로만 하게 하는 방법이 있었다. 안철수 후보의 대선공약 선에서 현실적 타협을 하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제대로 된 전략을 시행하는 것이 어떨까? 이것이 가장 바람직하지만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하는 의구심이 크다. 공약 이행 동력이 이미 크게 약화됐다. 공약의 지지자들조차 온통 관심을 개별 학교의 재지정 여부에 쏟고 있는 형국이다. 나의 관점에선 특정 학교의 재지정 여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래서 나는 현재 초미의 관심사가 된 전북교육청의 상산고등학교 자사고 재지정 불가 방침에 대해 정부가 ‘부동의’ 결정을 내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전북교육청의 재지정 불가 방침에 청와대가 제동을 걸려 한다는 언론 보도를 접했을 때 나는 그것을 애초에 잘못 설계된 이행 전략이 폐기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누가 보아도 전북교육청의 행동은 대통령의 대선공약과 따로 떼어 설명하기 어렵다. 전북교육청은 대선공약을 강하게 의식하고 행동했을 게 분명하다. 사실 여부를 떠나 대다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상황에서 문재인 정부(교육부)가 전북교육청의 결정에 흔쾌히 ‘동의’를 해주면 어떻게 될까? 교육감의 재지정 평가를 통해서 대선공약을 실현하겠다는 메시지가 강하게 전해질 수밖에 없다. 앞서 말했듯 이것은 결코 올바른 전략이 아니다. 올바른 전략을 실행할 게 아니라면 정부의 새로운 전략은 전략적 후퇴일 수 있다. 물론 이것은 공약에 대한 배신으로 보일 수 있다. 실제로 청와대가 상산고의 백기사로 나서려 한다는 보도가 있었을 때 많은 사람이 분노했다. 그러나 공약에 대한 배신은 청와대만 한 게 아니다. 정부의 잘못된 이행 전략에 침묵(동조)한 사람들 또한 공약을 배신한 거나 마찬가지다. 그들은 어쩌면 지금 두번째 잘못을 범하고 있다. 첫번째 것이 비판의 목소리를 높여야 할 때 침묵한 잘못이라면, 두번째 잘못은 침묵해야 할 상황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다. 나는 자사고 폐지론자지만 문재인 정부가 전북교육청의 상산고 재지정 불가 방침에 ‘부동의’ 한다면 나는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작정이다. 일탈이 정말 심한 외고·자사고·국제고는 어떻게 하냐고? 그것은 대선공약을 떠나 교육감들이 법령 취지에 맞게 성심성의껏 해결하면 되는 일이다.
[이슈논쟁] 자사고 재지정 논란
최근 전주 상산고와 경기 안산동산고, 부산 해운대고 등 3개 자율형사립고(자사고)가 해당 시도교육청으로부터 재지정 기준점에 못 미치는 점수를 받아 지정 취소가 결정되면서 자사고 폐지를 둘러싼 찬반 논란이 거세다. 이들 학교는 청문 절차를 거친 뒤 교육부 동의 여부에 따라 운명이 최종 결정된다. 이어 서울시교육청도 9일 서울 지역 자사고 13곳에 대한 재지정 평가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어서 추이가 주목되는 상황이다. 아래에 글을 보내온 이범 교육평론가와 이기정 구암고 교사는 모두 ‘자사고의 일반고 전환’ 필요성에 동의한다. 하지만 시도교육청별 재지정 평가를 통해 전환하기로 한 현재의 추진 방식에 대해 각기 다른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앞으로 정부·여당이 가야 할 길에 대한 두 사람의 제언을 들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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