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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평론가 자사고를 일반고로 전환하는 것은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다. 자사고는 대통령이 시행령만 개정하면 일반고로 ‘일괄 전환’할 수 있다. 나는 대선 당시 선거캠프의 일원으로서 ‘일괄 전환’을 전제로 사회적 비용을 최소화하는 방안들을 리포트했다. 그러나 대선 이후 문재인 정부는 줄곧 ‘점진적 전환’을 시사했다. 즉 ‘일괄 전환’을 포기하고 ‘점진적 전환’으로 방향을 잡아 공을 교육청으로 넘긴 것은 정부다. 자사고 재지정 기준을 70점으로 ‘권고’하되 시도별 자율을 허용하여 전북교육청이 80점으로 평가할 수 있게 한 것도 정부다. 그런데도 전북교육청이 상산고 탈락 점수를 발표하자마자 여당 국회의원들이 반기를 들었다. 정치 도의에 한참 어긋난 일이다. 물론 세부 평가 항목들에 시비가 있을 수 있다. 모자라는 점수가 0.39점이니 상산고가 법원에 집행 정지를 신청하면 어찌 될지 모른다. 하지만 상산고는 재수 비율이 공식 통계로만 50% 내외, 반수를 포함하면 3분의 2 이상으로 추정된다. 수능 일변도 교육과 높은 재수율을 통해 의대를 많이 보내기로 유명한 학교다. 그런데도 전임 국회의장인 여당의 정세균 의원은 상산고가 “4차 산업혁명을 주도할 인재”를 육성한다고 한다. 절로 실소가 나온다. 자사고를 인가한 공식 목적은 ‘다양한 교육’이다. 자사고 중에서도 하나고, 충남삼성고, 민사고는 다양한 선택과목을 개설하고(교육과정의 다양성) 주입식 수업과 객관식 평가에서 벗어나기 위한(교수학습방법의 다양성) 노력이 엿보인다. 그런데 상산고는 반대쪽 극단에 있는 학교다. 그런 교육은 재수전문인 강남대성학원이 제일 잘한다. 수능이 좋냐 나쁘냐와는 별개로, 한국 교육에 미래지향적으로 기여하는 게 없다.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교육개발원은 해마다 교육 여론조사를 실시한다. 지역별·성별·연령별로 2천명을 선정해 4주간 조사하므로, 응답률이 몇 %에 불과한 전화 여론조사보다 훨씬 신뢰도가 높다. 고교평준화에 대한 2016년 설문에서 찬성이 64.7%, 반대가 20.9%였다. 외고·국제고·자사고의 일반고 전환에 대한 2018년 설문에서 찬성이 47.2%, 반대가 15.2%였다. 이것은 국민들이 일반고에 만족해서가 아니다. 두 설문에서 찬성이 반대의 3배가 넘는 것은, 일부 고교가 학생선발권이라는 특권을 가짐으로써 서열화와 경쟁과 사교육이 심해지는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자사고를 옹호하기 위해 일반고의 문제를 들먹이는 것은 범주의 오류다. 후쿠시마산 농산물 수입을 반대하는 이유가 국산 농산물의 안전성을 믿어서가 아닌 것처럼. ‘학생선발권’은 엄청난 특권이다. 1970년대 고교평준화 이전 고교들이 학생선발권을 가지고 있을 때, 최고 명문고들은 모두 공립이었다. 지금 공립학교는 학생 선발을 하지 못하게 꽁꽁 묶어놓고 일부 사립학교들만 우수한 학생들을 먼저 뽑아갈 수 있도록 해놓은 것 자체가 엄청난 특권이자 불공평이다. 그나마 한국 교육에 미래지향적 기여를 한다면 그 특권을 정당화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전북교육청은 상산고의 교육과정 관련 주요 평가항목에 만점을 주었고, 교수학습방법(수업·평가방법)은 아예 평가하지 않았다. 전북교육청의 평가는 오히려 더 엄격하고 미래지향적이어야 했다. 미래 고교체계의 방향은 명확하다. 한국교육개발원의 여론조사에서 ‘평준화’를 지지하는 비율이 3분의 2 정도인데, ‘다양화’를 지지하는 비율도 3분의 2 정도다. 평준화하면서 동시에 다양화하라고? 평준화를 ‘획일화’로 해석하면 이 말은 모순이지만, 평준화를 ‘기회 균등’으로 해석하면 평준화와 다양화를 동시에 충족할 수 있다. 학생들에게 ‘최대한의 균등한 선택권’을 보장하면 된다. 서구 선진국에 특목고가 거의 없는 이유는, 외국어를 많이 선택(수강신청)하면 외고에 다니는 셈이고 수학·과학을 많이 선택하면 과학고에 다니는 셈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학생 중심’ 교육은 수업방식의 변화만이 아니라 학생 ‘개인’에게 최대한의 선택권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학생들은 잠잘 만한 과목은 선택하지 않는다. 수월성 교육도 해결된다. 수월성은 다양성의 부분집합이므로. 애초에 인문계(academic) 교육과정을 유지하면서 명칭만 ‘일반’고라고 바꾼 것이 기만적이었다. 감히 ‘일반’이라니, 실업계는 없는 셈 친 것 아닌가? 그나마 ‘일반’이라고 부르려면 학생들에게 과목 선택권을 주고, 개설 과목을 지금보다 훨씬 늘려야 한다. 일반(general)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영국과 미국이 그렇게 한다. 즉 고교학점제는 종착점이 아니라 출발점에 불과하다. 선택권을 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개설 과목을 더 늘려야 한다. 그런데 정부는 고교학점제를 다음 정부로 미뤘다. 아무리 대선 공약이라지만 전교조와 교총이 모두 반대하니 실행하기 어려웠다. 교원단체들은 학생들의 선택에 따라 과목별 교사 수요가 달라지는 상황을 원치 않는다. 한국 고교체계의 앞날은 그래서 어둡다. 출생률 꼴찌, 공부시간·사교육비 최고인 각박한 나라에서 자사고 옹호론은 한가한 주장이다. 그런데 반대쪽에 서 있는 집단은 일반고를 바꿀 의지가 없다. 그 와중에 실업계(직업) 교육을 받는 비율은 19%에 불과하다.(OECD 회원국 평균 46%) 그냥 적당히 분칠하면서 계속 이렇게 갈 가능성이 높다. 한심하다.
[이슈논쟁] 자사고 재지정 논란
최근 전주 상산고와 경기 안산동산고, 부산 해운대고 등 3개 자율형사립고(자사고)가 해당 시도교육청으로부터 재지정 기준점에 못 미치는 점수를 받아 지정 취소가 결정되면서 자사고 폐지를 둘러싼 찬반 논란이 거세다. 이들 학교는 청문 절차를 거친 뒤 교육부 동의 여부에 따라 운명이 최종 결정된다. 이어 서울시교육청도 9일 서울 지역 자사고 13곳에 대한 재지정 평가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어서 추이가 주목되는 상황이다. 아래에 글을 보내온 이범 교육평론가와 이기정 구암고 교사는 모두 ‘자사고의 일반고 전환’ 필요성에 동의한다. 하지만 시도교육청별 재지정 평가를 통해 전환하기로 한 현재의 추진 방식에 대해 각기 다른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앞으로 정부·여당이 가야 할 길에 대한 두 사람의 제언을 들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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