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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2.25 18:24 수정 : 2005.12.25 18:24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경제학

세상읽기

한 미국인 친구는 자신이 고교 시절 봤던 스페인어 교과서 예문 중에 ‘남미에서는 모두 가정부를 거느리고 산다’는 문장이 있었다고 한다. 현실성은 둘째치고, 논리적으로도 불가능한 말이다. 그렇다면 남의 집에서 가정부로 일하는 사람들도 가정부를 거느리고 산다는 말인가? 이것은 이 교과서의 저자가 대부분 가정부를 거느리고 사는 남미 중산층 이상만 접했던 자신의 협소한 경험을 별 생각 없이 일반화하였기에 할 수 있었던 말이다.

외환위기 이후 불거진 우리 경제의 양극화 문제에 대해 말은 무성하지만 실제적 조처가 없는 것도 우리나라의 지도자들이 이렇게 자기 주변만 보고 세상을 이해하기 때문에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다. 말로는 양극화를 걱정하면서, 정작 이를 해소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복지국가를 강화하자고 하면 독일 등 유럽 일부 국가의 최근 저성장을 지적하면서 ‘복지병’을 걱정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사회복지 지출은 국내총생산 대비 6.3% (2001년)로, 한국을 제외한 경제협력개발기구 가입국 평균 24%(1998년)에 비하면 터무니 없이 낮은 수준이어서, ‘복지병’을 걱정할 처지가 아니다. 물론 이 차이 중의 일부는 선진국의 고령화로 설명되지만, 같은 고령화 사회이면서도 일본은 그 비율이 15% 부근이고 스웨덴 등 북구는 30% 이상인 것을 보면 우리의 복지지출 수준이 낮은 것을 단순히 인구 연령구조로 설명할 수는 없다. 더욱이 우리의 복지지출 비율은 우리보다 소득도 낮고 인구도 훨씬 젊은 남미의 칠레 11%, 브라질 12%, 코스타리카 13%보다도 낮다(이상 1996년 기준).

물론 복지제도를 확장할 때 조심스럽게 할 필요는 있다. 모든 제도가 그렇듯이 복지제도도 잘못 설계하면 부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형평성을 강조하되 선택의 자유와 개인의 특수성을 포용할 수 있는 유연성이 있어야 한다. 또 빈곤을 탈출하자마자 복지 혜택 감소, 세금 부담 등으로 경제적 부담이 급격히 높아지지 않도록 하여 빈민들이 소위 ‘복지의 덫’(welfare trap) 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복지제도를 노동자 재교육과 잘 연계하여 복지의 생산적 효과를 극대화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스웨덴 등 북유럽 국가의 복지제도는 단순히 실업자 생계를 돕기 위해 실업보험을 지급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실업자를 재교육하고 취업을 알선하며, 필요하면 이주 보조금까지 지급한다. 그런 반면에 재교육 뒤 정부가 알선한 새 직장을 일정 회수 이상 거부하면 실업수당을 제한하여 복지제도의 남용을 막는다. 이러한 기제가 있기에 담세율이 세계 최고인 나라들이 실업률도 낮고, 성장률도 미국을 능가하며, 하다 못해 경영자의 시각에서 주로 평가하는 기업환경지수 같은 데에서도 세계 최상위권에 드는 ‘기업하기 좋은 나라’가 된 것이다.

물론 양극화의 문제는 복지국가만으로 해소될 수 없다. 일자리를 많이 만들고, 그 질을 높여야 한다. 일자리 창출을 위해서는 금융제도와 기업제도를 개선하여 투자를 촉진해야 하고, 질 높은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기술의 고급화를 추구해야 한다. 대기업들은 하청기업을 지나치게 압박하여 이윤을 올리는 것을 지양해야 하고, 기술협력을 통해 중소기업의 생산성 향상을 도와야 한다. 효과적인 투자와 경영의 합리화를 통해 저소득자가 많은 농업과 서비스업의 생산성을 높이는 것도 필요하다.

양극화가 우리 미래의 멍에가 되지 않게 하려면 하루라도 빨리 조처를 취해야 한다.

장하준/케임브리지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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