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8.25 17:57
수정 : 2019.08.25 19:11
이것이 민주주의 제도의 묘미인 걸까? 서로가 서로에게 기득권 세력이라고 손가락질한다. 한쪽에선 분탕질하는 친일적폐 세력이야말로 기득권 세력이라고 하고, 다른 한쪽에선 겉 다르고 속 다른 진보 세력이 바로 기득권 세력이라고 한다. 재미있다면 재미있는 형국이다. 우리 대중한테 밉보이지 않으려 고생이 많다.
하지만 진짜로 재미있는 지점은 그 어느 쪽도 자기가 기득권 세력이 아니라고 부인은 못한다는 것이다. 여태껏 그런 언설은 들어본 적이 없다. 그저 상대의 약점을 잡아 기득권 세력으로 몰고 가는 텅 빈 말들만 무성할 뿐이다. 무슨 뜻이겠는가. 결국 그 둘 다 기득권 세력이라는 뜻 아니겠는가.
21세기 한국은 19세기의 조선과 닮았다. 당파당색이 어떻든 이곳에는 자기들끼리의 인맥으로 태평성대를 누리는 상층회로가 있다. 가끔 그들이 ‘갑질’하는 게 들통나기도 해서 생존회로의 백성들은 불만, 분노, 적개심이 누적되고 있다. ‘헬조선’과 ‘수저’가 봉건제적·신분제적 속성을 간파한 유행어라는 사실이 새삼스러울 지경이다.
물론 21세기는 19세기와 다르다. 19세기에는 동학혁명. 21세기에는? 오늘날은 대중정치의 시대다. 그래서 당파들끼리 서로를 향해 기득권 세력이라 명명하며 대중의 지지를 호소하는 진풍경이 펼쳐지는 것이다. 호소가 아니라 선동이라 불러도 좋다. 어쨌든 오늘날 시민 대중은 누구를 향해서든 분노를 터뜨릴 준비가 돼 있으니까.
지난 몇년 사이 가장 빈번하게 쓰인 대중적 어휘 중 하나가 ‘기득권’이었던 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우리들은 기득권 세력에 화가 쌓일 대로 쌓여 있다. 정치혐오, 반기업 정서, 언론 불신 등등. 연원이야 어떻든 이제 한곳으로 모인다. 세계적으로도 유서 깊은 자본주의 체제일수록 반기득권의 목소리가 폭발 중이라 하지 않나. 현실에 대한 불만이 일기 시작하면 잠재해 있던 반기득권 정서가 꿈틀거리게 된다.
물론 기득권이라는 불충분하고 덜 과학적인 언어는 우리를 질곡에 빠뜨릴 수도 있다. 이전 정권에서 획책했던 것처럼 ‘노동귀족’이니 ‘강남좌파’니 하면서 애먼 사람을 기득권 세력으로 몰아붙일 수도 있다.(이미 그런 생각을 가진 대중도 많긴 하다.) 어쨌든 이번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 건으로 현 정권이 변곡점을 맞이할 것이란 예상도 충분히 가능하다. 촛불 효과가 흔들릴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 레임덕에 빠지거나, 아니면 자신들이 포함된 기존 정치세력의 헤게모니를 실추시키거나.
이 와중에도 자기들이 저쪽과는 질적으로 다르지 않냐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는 모양인데, 이제쯤이면 그런 언술로 누군가를 설득할 시점은 확실히 아닌 것 같다. 촛불 국면에서의 반사효과와 팬덤효과로 그동안 민주당 세력이 과잉대표됐을 뿐이다. 그에 반해 이번 일은 촛불을 들었던 시민들이 결코 같은 부류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강하게 확인시켜주고 있다.
‘질적으로’ 따진다면 차라리 전혀 다른 성격의 고민을 해야 한다. 기득권을 빼앗아야겠다는 시민들의 분노를 대의해줄 만한 정치세력이 등장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말이다. 물론 오늘날에는 시민대중이 말 그대로의 단일한 무리는 아니기에 그 향방을 점치는 게 매우 어려운 일이기는 하다. 그렇기에 진짜로 겁이 나는 게 있다면 (현재로선 가능성이 가장 높아 보이는데) 이번 사건에도 불구하고 정작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것, 그래서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의 핑퐁게임이 듀스로 들어가는 것이다. 물론 그 와중에 트럼프류의 인물이나 세력이 나온다면…. 뭐, 우리 국민들이 그렇게까지 최악의 수를 둘 것 같지는 않다.
김성윤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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