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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1.02 18:18 수정 : 2006.01.02 18:18

정혜신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칼럼

지난 섣달 그믐날 거행된 고 홍덕표, 전용철 농민의 영결식 장면은 슬프고 아리다. 두 사람의 고단한 영혼과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서 그들을 추모하는 이들의 눈물은 시위현장의 최루탄 파편처럼 가슴에 박힌다.

바로 전날 거행된 경찰청장의 퇴임식 또한 눈물바다였다고 전해진다. 한 경찰간부는 경찰청장의 사퇴를 지켜보면서 “억장이 무너질 정도로 가슴이 아프고 침통하다”고 표현하며, 떠나는 경찰청장은 이번 사건이 “공권력의 상징인 경찰청장이 물러날 사안은 아니라는 판단에는 변함이 없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검·경 수사권 조정과 관련한 경찰의 미묘하고 다급한 처지와 ‘인권경찰’을 표방하고 그 실천을 위해 애쓰던 허준영의 인물됨을 감안하면 진실로 그들의 심정을 이해못할 바 없다. 하지만 나는 경찰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이번 사건의 본질에 대해서 깜박깜박하고 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이번 사건의 본질은 평생 소작농으로 살면서 영정으로 쓸 변변한 사진 한 장조차 없는 촌로, 40대 중반이 넘도록 장가도 가지 못한 귀농자가 국가공권력의 폭압에 의해 억울하게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이다. 농업의 근본적 회생 대책이나 시위문화 개선, 혹은 경찰청장 임기제에 대한 논란은 그 다음이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경찰청장의 사퇴공방이 절정을 이루던 지난 주말 시사문제에 둔감한 지인 한 사람은 “왜 경찰청장의 사퇴문제로 이렇게 소란스러우냐”고 물었다. 대다수 언론의 보도와 논점은 임기제 공무원에 대한 대통령의 문책범위, 대통령과 경찰청장의 힘겨루기 양상, 국회정상화를 위한 정치권의 경찰청장 사퇴압박, 검·경 수사권 조정에 미칠 파장을 따져보는 경찰 수뇌부의 반응 등에 맞춰져 있어서 배아줄기세포나 테라토마의 용어설명처럼 상자기사로 처리해서 사건의 전말을 따로 자상하게 설명해 주지 않으면 도대체 왜 경찰청장이 사퇴해야 하는지 알기 어려웠다.

‘청와대 압박에 무너진 항명 48시간’ 따위의 큼지막한 표제어가 난무하는 상황에서 홍덕표나 전용철이라는 평범한 이름과 “지금도 희망을 찾지 못해 농약을 마실까 말까 망설이는 농민이 많이 있다”는 농민단체 지도부의 피맺힌 호소를 어찌 알 수 있었으랴. 비유를 하자면 애초부터 시작과 끝이 비극적 성격의 드라마인데 중간부터 보기 시작한 사람은 아마도 자신이 정치 스릴러물을 보는 줄 알았을 것이다. ‘스승의 은혜’로 시작한 노래가 중간쯤에 ‘어머님의 은혜’로 가락이 바뀌어 마무리되는 식이다. 사건의 발단은 저만치 밀려난 채 ‘너 몇 살이야?’로 번져가는 길거리 싸움처럼 본질은 이미 사라지고 잇따른 다른 문제들이 중심 현안으로 부각된다.

대국민사과 후 사퇴불가 입장을 밝힌 경찰청장이 공식행사를 집무실에서 처리하고 있다든가 권력 수뇌부가 그런 상황에서 어떤 식으로 전방위적인 물밑작업을 하고 있는지 또는 밤샘고민 끝에 눈물을 흩뿌리며 사퇴를 결심했다는 경찰청장의 동태가 중계방송식으로 보도된다. 야당 대변인이 ‘시위에서 사람이 죽을 때마다 경찰청장이 물러나야 하느냐’는 볼멘 소리를 던지지 않아도 경찰청장이 얼마나 중요한 자리인지를 우리 모두는 알게 되었다.

하지만 한 인간의 존엄이나 생명의 가치는 대한민국 모든 고위공직자의 자리를 합해놓은 것보다 훨씬 무겁다. 두 사람의 죽음을 불러온 이 비통하고 엄중한 사태 앞에서 경찰청장의 사퇴는 문제해결을 위한 첫 시작에 불과하다. 언론을 통해 후임 경찰청장 인선에 대한 갖가지 정치적 추측을 접하면서 전임 경찰청장이 자리에서 왜 물러났는지에 대한 본래 이유를 알고는 있었는지 다시 묻고 싶어진다.

정혜신/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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