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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1.08 18:32 수정 : 2006.01.08 22:04

이명원 서울디지털대 문예창작학부 교수

야!한국사회

두 명의 소장 정치인이 새해 정국에서 기묘한 ‘왕따’의 처지로 전락했다.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내정된 유시민 의원과 사학법 투쟁에 ‘올인’하고 있는 박근혜 체제를 직설적으로 비판한 원희룡 의원이 그 주인공이다. 속해 있는 정당은 다르지만, 이들이 처해 있는 위치는 비슷하다.

현상적으로 보면, 그들은 고독한 소수파다. 보건복지부 장관에 내정되는 순간, 유시민은 당내의 격심한 반발 때문에 당황했을 것이다. 특히 당내의 소장파들조차 유시민의 보건복지부 장관 내정을 충격으로 느낀 것에 대해, 오히려 가장 큰 충격을 느꼈던 것은 유시민 자신이었을 것이다. 그가 언론과의 일체의 접촉을 끊고 수일간 ‘잠행의 시간’을 자처했던 것은 그런 까닭이 아니었을까.

원희룡은 어떤가. 자신의 홈페이지에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썼다. 때아닌 장외투쟁에 골몰하면서, 사학법 투쟁을 범주가 다른 국가정체성 문제와 결부시키는 박근혜 체제의 판단 오류에 대해 원희룡은 개혁파로서의 소신을 밝힌 바 있다. 이에 대한 당내 다수파의 반응은 한심했다.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이런 식이 아니었을까. “너 열린우리당 편이지. 그럼 한나라당 나가.”

나는 유시민과 원희룡을 전면적으로 옹호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평소 나는 이분들에게 상당히 비판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다. 나는 유시민의 자유주의가 때때로 ‘국익옹호’의 반민중성으로 회귀하는 것이 아닌가 진심으로 염려했다. 나는 원희룡의 개혁적 소신이 한나라당 안에서 그 수구성을 은폐하는 ‘꽃을 든 괴물’ 효과 또는 악세서리 개혁성으로 전락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나는 소수파라는 이들의 상황적 정체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소수파는 흔히 과격한 이미지로 표상된다. 문단에서 나 역시 소수파이지만, 내 의지와 무관하게 그런 이미지를 뒤집어 쓴 체험을 회상해 보면, 그것은 사실일 것이다. 유시민이 ‘독설’의 정치인으로 표상되고, 당내의 합리적 비판세력인 원희룡이 ‘뒷 담화’의 주인공처럼 간주되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다수파의 목소리는 당론이기 때문에, 점잖은 표정으로 선언하는 것만으로도 효과가 있다. 그러나 소수파의 목소리는 아무리 악을 쓰고 떠들어도 들리지 않기 때문에, 대중적으로 드러나는 이미지는 메시지가 아닌 ‘스타일’일 확률이 높다. 유시민과 원희룡에 대한 당내 다수파의 냉소는 그런 점에서, 메시지에 대한 합리적 거부이기보다는 스타일에 대한 정서적 혐오처럼 나는 느껴진다.

그러나 다수파보다는 소수파를 옹호하는 것이 한국사회의 진로에 더욱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수파는 대체로 반성하지 않는다. 반성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반성과 성찰을 촉구하는 소수파를 간단히 제압하는 것으로 구체제를 지속시킨다. 이에 반해 소수파는 그 표면적인 과격성의 이미지와는 완전히 반대의 지점에서, 근본적인 자기성찰과 타자성찰을 지속한다. 물론 소수파 역시 성찰능력이 마비되면, 말 그대로 독설과 독선, 냉소로 무장된 자폐아로 전락할 것이지만.

나는 유시민과 원희룡에게서 소수파의 희망을 보고 싶다. 어떤 정치인의 ‘과거’도 중요하지만, 역시 중요한 것은 ‘미래’다. 사석에서 자주 나는 이 두 정치인의 짧은 정치역정의 ‘과거’를 비판하곤 했지만, 지금부터는 더 나은 ‘미래’에 주목하고 싶다. 소수파에게 희망을. 올 한해는 이런 문장을 노트에 적고 싶다.


이명원/서울디지털대 문예창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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