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1.09 18:59
수정 : 2006.01.09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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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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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칼럼
새해 첫날 텔레비전 뉴스 진행자가 “월드컵의 새해가 밝았습니다”라고 인사하는 걸 보았다. 희망찬 새해라고 하면 너무 상투적이었을 것이다. 병술년 새해라고 하면 고답적인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월드컵의 새해라고 말하는 것은 좀 가볍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운동경기 중에는 축구경기 보는 것을 좋아한다.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 축구경기 장면이 나오면 거기 오래 머물러 있는다. 박주영을 좋아하고 박지성을 좋아한다. 그들의 역량, 그들의 질주, 그들의 플레이에 박수를 보낸다. 무엇보다 그들의 풋풋함이 맘에 든다.
그러나 새해 첫날부터 시작하여 일년 내내 축구 이야기만 하는 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연초부터 방송은 앞다투어 우리나라와 같은 조에 들어 있는 상대 나라의 전력을 분석하고 운동장에서 몸 풀고 있는 장면이라도 보여 주고 인터뷰 한마디라도 따기 위해 국외로 날아다니고 있다. 다른 나라의 평가전이나 우리나라의 전지훈련이 있을 때마다 방송은 빼놓지 않고 보여 주고자 할 것이다. 6월까지는 축구 프로그램이 엄청나게 쏟아져 나올 것이 틀림없다. 아니 6월이 지나도 월드컵 경기를 계속해서 재방송할 것이다. 지난 2002년 월드컵 경기를 우리는 4년 동안이나 반복해서 보지 않았는가.
그러나 온 나라를 축구 이야기로 끌고 가는 동안 공연장은 썰렁하고 책은 팔리지 않으며 콘서트는 기획 자체를 6월 이후로 미루어 놓아야 한다면 그것도 문제다. 지난번 월드컵 경기 중에 공연이 잡혀 있던 어떤 극단은 “공연을 30분으로 줄이고 공연장에 대형 스크린을 준비하겠습니다. 꼭 와 주세요”라고 홍보를 해야 했다. 물론 삼분의 일로 축소된 공연은 서둘러 막을 내렸다. 연초부터 이렇게 온 나라가 들떠 있는데 누가 책을 보고 공연 티켓을 사려고 하겠는가.
거기다 5월에는 선거가 있으니 선거 이야기로 몇 달은 시끄럽고 정신이 없을 것이다. 출판사들은 한숨이 나오게 생겼고 작가들은 일단 상반기에 책 내는 건 유보해야 할 형편이다. 재미있는 것, 돈 되는 것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고개조차 들 수 없는 문화는 미래가 없는 문화이다. 핵무기가 있어도 자랑할 만한 문화가 없으면 무시당하고, 운동경기에서 금메달을 아무리 많이 따도 세계적인 작가가 없는 나라는 크게 인정하지 않는다.
김구 선생의 말씀처럼 나도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그런 문화의 힘을 가진 나라가 되어야 한다. 문화의 힘이 바탕이 되어 있으면서 다른 것도 세계 여러 나라에 견주어 뒤떨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김지하 시인의 지적대로 지난 월드컵대회 때 보여준 붉은악마와 700만명이 넘는 사람들의 결집된 힘이 ‘문화적 비약의 콘텐츠’가 되길 바란다. “그들이 결코 국수주의자가 아니”며 “직감적으로 민족과 동양을 알고 있고 사랑하며” “생리적으로 열린 삶, 전지구적인 개방사회를 지지”하는 거대한 흐름이 되길 바란다. 새해가 시작된 지금은 문화를 초점으로 우리 앞에 놓인 월드컵을 바라보고 그 힘과 기대가 어떻게 ‘문화적 비약의 콘텐츠’가 되게 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그저 일년 내내 국민들이 축구공만 쳐다보게 하는 게 아니라, 축구공 이상의 것을 어떻게 창조해 내고 결집시켜 낼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도종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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