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1.10 18:13
수정 : 2006.01.10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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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병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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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햇발
지난 5일, 승려 지율이 세영 스님한테 업혀 병원으로 실려갔다. 그 사진을 보다 갑자기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떠올랐다. 12월27일 의원총회에서 눈물을 비치던 모습이 지율의 사진에 겹쳐졌다. 망측한 연상이었다. 가장 낮은 곳을 선택한 수행자와 권력의 정점에 서 있는 정치인, 뭇 생명의 친구를 자처하는 성직자와 아버지 박정희와 다름 없는 개발·성장 주의자를 비교하다니, 두 사람에게 두루 불쾌한 일이었을 것이다.
서둘러 지우려 했다. 그러나 연상의 이유만 또렷해졌다. 우선 두 사람은 지금 목숨을 걸고 있다. 한 사람은 경부고속전철 천성산 터널 공사를 막기 위해서, 다른 한 사람은 개정 사립학교법을 무효화하는 데 걸었다. 둘째, 게다가 두 사람은 생명을 자주 거는 편이었다. 한 사람은 단식만 다섯 번째이고, 다른 사람은 지난해에도 비슷하게 생명을 걸었다. 셋째, 비타협적이다.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이의를 제기했다가는 조직을 외면한 소영웅주의자 혹은 운동의 대의를 버린 기회주의자로 내몰릴 수 있다. 넷째, 자신의 신념과 판단의 무오류성에 대한 믿음이 확고부동하다. 이들에게 다른 신념이나 원칙은 공존이 불가능해 보인다.
이런 요소들을 한마디로 표현하는 말이 있다. 근본주의다. 20세기 초 자유주의 신학에 맞서 나온 신앙운동이다. 예수의 처녀몸 탄생, 육체적 부활, 예수의 기적 등 성경엔 일체 오류가 없다는 신념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근본주의는 성경에 대한 어떤 이의 제기나 해석도 허락하지 않았으며, 이를 이단으로 단죄했다. 지금은 종교 이외에 정치·경제·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자신의 원칙과 신념을 유일한 기준으로 삼는 것을 뜻하는 말로 통용된다. 기독교 근본주의와 정치적 패권주의가 결합한 것이 현재 미국의 부시 행정부다.
불가에선 불살생을 가장 큰 교리로 삼는다. 모든 생명이 하나인데, 어찌 다른 생명을 해칠 수 있을까. 특히 지율은 천성산 내원암 산감으로서 그곳 생명이 위해를 당하는 걸 지켜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천성산 바깥의 생명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우회노선이 채택되면 자연의 친구가 갑절이나 더 죽어갈 텐데도 말이다. 반도 남쪽을 바둑판처럼 쪼개놓는 수많은 개발에 대해서도 말이 없다. 북한산 국립공원에서 거대한 불사가 벌어지고 있을 때도 천성산 생명만을 이야기했다. 차라리 공사가 시작되기 전 호남고속철 저지에 목숨을 건다면 모르겠다.
박 대표는 개정 사학법이 아이들을 붉게 물들게 할 것이라며, 사학법 반대투쟁은 국가 정체성 수호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북한에 의해 죽은 엄마’를 거론하며 눈물로 설득한다. 그것은 정치적 전술이 아니라 신념의 소산인 게 분명했다. 문제는 신념에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특히나 다른 의견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원희룡 최고위원은 이를 “과거 지향적, 대결적, 관념적”이라고 말했다가 치도곤을 당했다.
근본주의가 세상을 불화케 하는 것은 다른 사상·종교·신념·문화를 인정하지 않고 해체하려 하기 때문이다. 21세기를 생명의 세기라고들 한다. 생명은 음과 양, 빛과 그림자, 산과 물, 구름과 바람, 나와 너가 하나되어 탄생한다. 생명을 잉태하고 키우는 건 여성성이다. 여성은 근본주의자와 어울리지 않는다. 반대로 여성성은 상생과 조화, 그리고 창조를 상징한다. 나는 지율과 박 대표의 ‘목숨을 거는’ 행위들이 지배적인 남성성에 휩쓸려 잠시 곁길로 빠진 탓이라고 믿고 싶다.
곽병찬 논설위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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