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1.11 18:41
수정 : 2006.01.11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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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하시 데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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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창
새로운 해가 시작됐다. 한-일 관계를 비롯해 동아시아의 역사 문제와 일본의 책임에 관심을 가져온 내게는 조금 우울한 연초다. 고이즈미 총리의 되풀이되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로 중-일 관계는 국교 회복 이후 ‘최악’이라고 한다. 한-일 관계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하지만, 역사와 독도(다케시마) 문제 등 불씨가 많다. 경제·문화적 교류는 전에 없이 깊어졌지만, 만화 <혐한류>가 베스트셀러가 되는 등 일본 시민사회에서도 감정적인 배외주의가 점점 확산되고 있다.
그럼에도 연초 기쁜 일도 있었다. 1월6일부터 사흘 동안 도쿄대의 ‘공생을 위한 국제철학교류센터’(UTCP)가 주최한 국제심포지엄 ‘동아시아에서의 법·역사·폭력’이 대성공을 거두었다. 나는 제4부문 ‘대화의 논리’의 책임자였다. 이번 심포지엄은 동아시아 현대사 안에서 철학적으로 생각해야 할 주제를 찾아내 한국·중국·대만의 연구자들과 3년 동안 진행해온 연구작업을 마무리짓는 행사였다. 초점은 법 그 자체가 억압의 수단이 되는, ‘법’과 ‘폭력’의 공범관계를 묻는 것이다. 전쟁과 식민지배, 군사독재 등 폭력으로 가득찬 동아시아의 근현대사에선 그런 사례가 풍부하다. 우리의 목적은, 법과 폭력을 둘러싼 각각의 역사적 경험 속에서 스스로 껴안지 않을 수 없었던 문제에 대해 대화와 인식을 깊게 하는 것이었다.
첫날의 세션 ‘근대화·젠더·폭력’에선 기타가와 사키코 도쿄대 교수, 천차오주 국립대만대 교수, 김혜숙 이화여대 교수가 발표를 했다. 각국에서 근대화는 서로 다른 형태를 보이면서도, ‘여성’들에게는 양면적이며 시련으로 가득찬 것이었다는 내용이다.
이틀째는 ‘법·전쟁·식민지’ ‘포스트 1945년사에서의 법·폭력·트라우마’ 세션이 있었다. 그 가운데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와 투샹펑 우한대 교수의 발표가 주목받았다. 한 교수는 국정원 과거사진실규명위에서 자신이 책임자가 돼 작성한 인혁당재건위와 민청학련 사건에 관한 보고서를 소개함으로써 박정희 정권이 저지른 ‘법에 의한 살인’을 논했다. 회의장 전체가 숨을 삼킨 채 몰두한 것은, 이런 사건이 민주화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날조한 사건임을 증명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한 교수는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 청산에서는 궁지에 몰린 백인 쪽이 권력 이양에 동의하고 협력한 반면, 한국에서는 박 정권의 흐름을 이어받은 보수세력이 여전히 강력한 힘을 쥔 채 협력을 거부하는 상황에서 진상조사가 진행됐다는 점을 설명했다. 그때 청중들은 모두 한국의 ‘과거사 청산’이 얼마나 힘든 과제인지를 이해했다.
투 교수의 발표는 문화대혁명을 ‘국가의 이데올로기 폭력’으로 포착했다. 그 폭력의 트라우마적인 기억이 현대 중국 문학작품에 어떻게 표현되는지를 분석했다. 젊은 중국인 연구자가 문혁의 폭력성에 매우 깊이있는 비판적 분석을 전개한 것을 많은 일본인 청중들은 놀랍게 받아들였다.
사흘째 세션 ‘트라우마적 역사에서의 권력과 폭력’에선 한승미 연세대 교수의 ‘새마을운동’에 대한 상세한 분석과 UTCP 김항 연구원의 ‘광주의 기억과 국립묘지’에 관한 발표도 있었다.
참가자는 연인원 600명에 이르렀고, 일반 시민도 토론에 열심히 참여했다. 무엇보다도 인상적이었던 것은, 자국 근현대사의 국가 폭력 문제에 자기성찰의 자세로 임한 발표가 많고 그것들이 겹쳐짐으로써 폭력의 역사와 현재를 비판적으로 대하려는 일종의 지적 연대감이 형성된 것이었다. 앞으로도 이런 대화를 계속해나가고 싶다.
다카하시 데쓰야/도쿄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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