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1.15 20:24
수정 : 2006.01.16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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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범 대전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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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여러분이 필리핀 유학생이라고 가정합시다. 거기서 한국 기업이 체불과 인권침해를 하자 필리핀 노동자들이 시위를 벌이겠다고 여러분에게 번역, 시위 조언 등의 부탁을 해왔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학생들에게 수업 중에 던진 질문이다. 난감해하던 학생들 중에서 한 명이 손을 들고 대답했다. “못할 것 같아요.” “왜죠?” “국익에 위배되는 것 같아서….”
여기서 읽는 것은 그 학생이 ‘국익’이라는 가치를 판단의 주요 근거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국익이 정의, 평등, 박애, 인권 등 의 보편적 가치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대한 성찰이 없다. 과연 이런 식의 사고는 교실 안의 소수 학생에 한정된 것일까?
한국사회에서는 누구든지 보편적 가치로 ‘국익’과 ‘국가경쟁력’ 등을 얘기한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누구의 이익을 대변하는지에 대한 고민은 부족하다. 국익이 사실 사회와 긴장을 이루는 국가기구의 이익이 아니라 국민이익의 준말이라고 생각해야 하는데도 실상은 반대다. 뭔가 사회와 시민 위에 군림하는 초월적 가치라는 생각이 팽배하다. 국민이익이라고 생각해도 그렇다.(물론 국민학교도 폐지된 마당에 국민이익이 아니라 시민이익이라는 게 옳다). 과연 사회 전체의 이익을 집약하는 그런 이익이 존재할까? 재벌과 노동자의 이익은 대립하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상충하고, 전자제품 수출업자와 농민의 이익은 모순된다. 한국사회는 서로 충돌하고 모순되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과연 최대 공약수를 이끌어내고 있는가? 그리고 그것을 과연 국익이라고 부르고 있는가?
더구나 세계화 시대에 국적과 국가적 경계를 바탕으로 하는 이익 구분은 모호하기 짝이 없다. 한국사회의 상층부는 하층부와 함께 ‘국익’으로 포괄될 수 있는가? 세계자본주의 체제 중심부의 상층부와 이해관계를 같이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한국농민의 이익은 한국재벌의 이익보다는 어떤 나라의 농민들 이익과 더 가까운 데 있지 않을까? 이런 의문을 던져보면 국익이 절대로 두부모처럼 잘릴 수 있는 한국사회 대다수의 이익을 의미한다고 보기 어렵다. 어떤 한국인의 이익은 미국인, 일본인과 일치하며 그 반대의 경우도 성립한다.
오히려 국익이라는 ‘무시무시한’ 단어 속에서 4700만의 한국인 이익을 하나로 수렴하는 뭔가 초월적 가치가 존재한다고 믿게 된다. 거기서 오히려 득을 보는 소수집단은 대표성을 띠게 되고, 사회적 약자나 다수의 이익은 집단이기주의에서 나오는 발상으로 추정되기 일쑤다. 더구나 국가=사회=대기업=나라가 당연하다는 듯이 등치되는 분위기 아래서 사회적 약자-여성, 빈곤층, 장애자, 비이성애자 등의 이익이 국익으로 대접받은 적이 있는가? 그것은 한국사회 대다수 이익을 대변하는 개념이라기보다는 소수의 이익을 추상화시켜 은폐하는 도구가 아닐까?
한국사회는 지나치게 국익, 국가경쟁력 등의 애국주의적 국가주의적 개념과 가치에 몰두해 왔다. 그 결과 보편적 가치인 진실, 자유, 평등, 박애 등의 가치를 껍데기로 만들거나 하위가치로 하락시켰다고 볼 수 있다. 논란이 되고 있는 쌀 수입 개방, 이라크파병, 생명공학의 윤리적 문제, 사학법 개정 등에서 보기 힘든 것들은 보편적 가치와 사회적 약자의 이익을 둘러싼 논란이다. 요란한 것은 ‘진정한 국익’ ‘나라를 위해서’의 나팔소리다. 국익이라는 환상 속에서 누가 희생을 당하고 있고 인류의 어떤 보편적 윤리가 묵살되고 있는지 다시 한번 따져볼 때다.
권혁범/대전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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