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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1.19 21:51 수정 : 2006.01.19 21:53

차인순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입법심의관

기고

최근 남성 차별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지고 있다. 서울행정법원은 지난 12일 국민연금법 조항 가운데 유족연금의 남편 차별 조항에 대해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했다. 2004년부터 국회에 계류 중인 국민연금법 개정안에는 이러한 남성 차별 조항을 개정하는 내용이 이미 포함되어 있는 상태다. 여성가족부가 11일 발표한 ‘현행 법령상 남녀 차별 조항 발굴 조사 결과’가 여러 언론의 관심을 끈 것도 남성 차별 조항이 적잖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각종 고시와 입사시험에서 여성비율이 늘고 대학 입학과 졸업에서 여성이 수석을 하는 추세가 두드러지는 가운데, 평소엔 쉽지 않았던 남성 차별에 대한 문제 제기는 어느 신문의 한 면 대부분을 차지할 만큼 갈급했던 것 같다.

남성 차별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성평등의 관점에서 볼 때 환영할 만한 일이며, 필요한 일이다. 그렇지만 〈한겨레〉를 비롯해 몇몇 언론이 보도한 것과 달리, 이러한 남성 차별 조항은 남성에 대한 ‘역차별’은 아니다. 성평등이 말 그대로 ‘성 평등’인 만큼 여성의 문제만 보자는 것은 애초부터 아니었다. 다만 이것이 사회에서 여성의 문제로 늘 범주화되는 것은 성평등의 문제가 여성들에게는 좀더 심각한 존재의 문제였고, 역사를 들춰보면 이 때문에 죽거나 사회적으로 지탄받은 여성들도 적지 않았다.

‘역차별’이란 말은 실상 여성들이 성평등에 대한 조처를 적극적으로 펴 나가고자 할 때 이에 대한 대항의 의미로 만들어진 것이다. ‘누적된’ 불평등 구조에 대한 ‘작은’ 대안 중 하나로 여성할당제나 여성채용목표제 등을 실시하려 했을 때 ‘역차별’ 주장은 이를 “여성 우대, 남성 차별”이라고 항변하곤 했다. 하지만 이 주장은 군과 경찰 등에서 여성을 제한적으로 받아들이고, 예술 전공과 교육 전공에서 남학생 할당제를 실시하고, 기업들이 여성 신입사원의 비율을 내부적으로 제한하는 지배적 현실에 대해서는 침묵해 왔다. 이처럼 ‘역차별’은 외면상 평등을 전제로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성평등이 적극적으로 확대되는 것에 대한 부정의 의미로 구성되어 왔다.

우리 법에 남아 있는 남성 차별 조항은 성역할 구분과 그에 기초하여 사회·경제적 귄리와 책임을 부여해왔던 가부장제 패러다임의 법적 유물에 다름 아니다. 이는 여성 차별의 문제를 제기할 때 그 문제의 근원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남성 차별의 개선은 가부장적인 사회의 패러다임을 고쳐나가는 과정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이지, 적극적인 평등조처를 부정하는 용어로 회자되어 온 ‘역차별’로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남녀 차별 개선은 성평등 실현의 밑그림에 불과하다. 사회 전체가 성평등 패러다임으로 변화해가는 여정을 생각한다면 이제 시작일 뿐이다. 지난 연말에 한 일간지에서 남녀 중견 리더 7명에게 물었다. “다시 태어난다면?” 7명 중 6명이 남성으로 태어나고 싶다고 했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으로 사는 것은 여전히 불편하다. 성평등은 본질적으로 ‘역차별’을 함축할 수 없다. 성평등의 가치는 기본적으로 사회적 약자의 처지에서 자신과 사회에 대한 지속적 성찰을 요구한다. 이 때문에 남성이 차별받는 문제에도 성평등은 열려 있다. ‘역차별’이 여성들의 평등 요구에 맞서는 ‘저항 언어’로 사용되지 않고 성평등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가 되기를 희망한다. 정말 사회가 역차별의 수준까지 진보한다면, 성평등 주장은 조용히, 그리고 쿨하게 떠날 것이다.

차인순/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입법심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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