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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1.24 18:03 수정 : 2006.01.24 18:03

신기섭 논설위원

아침햇발

일제시대 여성 비행사 박경원을 다룬 영화 <청연>이, 개봉에 맞춰 불거진 주인공의 친일 문제로 흥행에 실패했다고들 한다. 여전히 강력한 금기인 친일은 곧바로 민족주의를 연상시키지만, 요즘엔 이 연상작용이 ‘국가’ 또는 ‘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듯하다. 연초 이 영화 얘기를 들으면서 글쓴이의 눈길이 독일 월드컵 축구로 옮겨간 것도 이 작용의 연장이다. 물론 언론의 대대적인 월드컵 보도가 작용한 측면도 있다. 언론들은 사회의 관심을 월드컵으로 몰아가고 있으며, 이렇게 시작된 열기는 6월까지 줄곧 이어질 것이다.

그런데 엉뚱한 질문이지만, 왜 우린 이렇게 축구에 집착하는 걸까? 2002년 월드컵에서 ‘국위를 선양한’ 기억이 생생해서일까? 국위 선양으로 말하면, 지난해 10월 세계대회 단체전에서 우승한 여성 펜싱 대표팀이 축구팀보다 몇곱절은 더 하다. 펜싱은 서구 백인들의 자존심처럼 남아있는 몇 안 되는 종목인데, 지난해 초만 해도 세계 15위 수준이던 ‘노란 피부색에 키도 작고 팔도 짧은 여성들’에게 줄줄이 나가떨어졌으니 말이다.

축구와 펜싱의 재미와 비중이 같을 순 없지만, 그래도 축구에 대한 관심은 유별나다. 아무래도 2002년 거리를 메운 태극기 물결을 이유로 꼽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대회를 6개월 가량 앞둔 지금부터 그때에 버금가는 거리응원 계획이 나오는 것만 봐도 그렇다. 사실 글쓴이도 당시를 다시 생각하면 가슴이 뛰곤 한다. 우리 심성에 워낙 뿌리 깊은 애국심 탓이라고 해도 애써 부인할 생각은 없다. ‘애국심에 젖은 나’를 돌아볼 능력이 마비된 채 맹목에 빠지지 않는다면 심각한 문제는 아니다.

폐쇄된 공산 국가 알바니아에서 청년기를 보낸 망명 시인 가지 카플란은 맹목적 애국을 세 단계로 나눴다. 첫째는 국가적 가치의 영광을 찬양하고 외국인을 혐오하는 단계, 둘째는 반역자나 외국의 음모를 강조하는 ‘음모 담론’의 단계, 셋째는 자기 민족이 선택받았으며 희생당하고 위협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과대망상 담론’ 단계다. 이런 맹목을 피하는 유일한 길은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다. 개인 차원의 반성도 필요하지만 더욱 절실한 것은 사회적 성찰이다. 우리가 왜, 무엇에 열광하는가, 위험 수위는 아닌가 하는 질문을 계속 던져야 한다.

그런데 애국심·민족·국익 등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촉구하는 목소리들을 듣다보면, 이 또한 맹목 같은 데 사로잡혀 있는 게 아닌가 불안할 때가 있다. 무턱대고 파시즘의 혐의를 씌우는 경우가 바로 그렇다. 과연 파시즘의 특징을 따져보고 하는 소릴까, 아니면 유행어라서 가져다 붙이는 걸까 싶다.

정치학자 마크 네오클레우스는 파시즘이 민족주의적·반혁명적 목적을 위한 대중 동원, 군사적 행동주의, 억압적 국가 장치의 운동을 수반한다고 했다. 한나 아렌트 같은 이들은 일당 독재, 테러 체제, 대중매체의 독점, 무기 독점 등을 내용으로 한다고 했다. 또 마르크스 주의자들은, 부르주아들이 의회 민주주의 등 기존의 수단으로 무산계급을 억누를 수 없을 때 동원하는 극단적 수단이라고 주장한다. 이 가운데 어느 것을 적용하든 우리 현실과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무엇이 같고 어떤 점이 다른지 세세히 따지지 않으면, 기껏 남는 건 딱지붙이기의 폭력이다. 어쩌면 이는 ‘애국심에 빠진 우리’의 그늘인지 모른다. 그래서 미술사학자 아비 바르부르크의 좌우명을 곱씹어봐야 한다. “신은 세부(묘사)에 깃들어 있다.”

신기섭 논설위원 mari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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