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1.25 18:01
수정 : 2006.01.25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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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순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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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순칼럼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합의,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 등 전문용어들이 언론매체에 다시 넘쳐난다. 특정 분야에 관심이 깊은 사람이 아니라면 개념조차 쉽게 들어오지 않는 이런 용어들이 주요하게 다뤄지는 것은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 정세가 여전히 불투명하고 미묘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9·11 동시다발 테러 이후 세계적으로 미군 재편 전략을 몰아붙이고 있는 미국의 압력을 직접 상대하는 정부 당국자들의 고충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유연성 원칙에 선뜻 합의해준 것은 아무래도 성급했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다.
주한미군을 기동타격대처럼 운용하는 유연성을 인정할 때 먼저 떠오르는 불길한 시나리오는 대만해협을 둘러싼 미-중 충돌 가능성이다. 세월이 많이 흐르기는 했지만, 기본 구도는 한국전쟁 때와 별로 다르지 않다. 작가 황석영씨의 〈손님〉이나 권정생씨의 〈몽실언니〉 같은 작품에는 한국전쟁이 우리 겨레에 얼마나 치유되기 어려운 상처를 남겼는지가 생생하게 드러난다. 이 전쟁을 이모저모 따져보기에는 남과 북 모두 제약 요인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이데올로기적 족쇄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외국인 학자들은 일반인에게 낯선 해석들을 내놓고 있다.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 같은 이는 한국전쟁을 미-중 전쟁의 연장 차원에서 설명한다. 중-일 전쟁 기간에 소강상태에 들어갔던 중국의 국-공 내전은 1945년 일본의 무조건 항복 이후 재개됐다. 마오쩌둥의 홍군은 47년 말 동북삼성 전역을 제압하고 남진을 시작했다. 마오는 미국의 간섭을 우려한 소련의 절대 권력자 스탈린으로부터 자제를 요구받지만 무시한다.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국민당군을 밀어내고 대륙 본토를 장악하는 과정에서 항상 미국의 간섭 가능성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북한 지도부의 남침 결정은 중국혁명의 성공에 고무된 바 크다. 또한 한반도에서 정면으로 맞붙은 미국과 중국의 처지에서 보면 한국전쟁은 중국혁명의 성패에 끝장을 내기 위한 결전이었다고 볼 수 있다. 53년의 휴전협정 조인으로 한반도에서 무력충돌이 끝난 이후에도 대만을 비호하는 미국과 중국의 적대관계가 계속됐다. 70년대 들어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방중과 미-중 관계 정상화가 이뤄졌지만, 상호 불신의 저류는 별로 바뀌지 않았다. 클린턴 행정부 때 ‘전략적 동반자’로 격상됐던 미-중 관계는 부시 2세 행정부에서는 ‘전략적 경쟁자’로 대결 색채가 다시 짙어졌다.
동아시아에서 두 거인이 잠재적 적으로 보며 힘을 겨루는 틀에서 자유로운 역내 국가는 없다. 일본이 90년대 말부터 주변사태 관련법과 무력공격 사태법 등 잇따라 전시 대비법을 제정한 것은 한반도와 대만 사태를 상정한 미국의 압력에 따른 것이다. 우리의 처지는 더욱 곤혹스럽다. 최근 한-미 동맹이 갈림길에 섰다며 틈만 나면 정부의 노선을 부시 행정부의 네오콘들에 고자질하는 듯한 무리들이 있지만, 우리의 최우선 순위를 분명히하면 어려운 시기를 헤쳐 나가는 것이 그리 버거운 일은 아니다. 한반도에서 전쟁의 참화가 재발하는 것을 막고 항구적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지상과제다. 한국의 외교안보 정책이 미숙련자들 손에 좌우되고 있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닦이지 않은 길을 여는 일이다. 한국 외교가 절대적 대미 추종 노선에서 아주 조심스럽게나마 새로운 발상을 시도해본 것 자체가 얼마 되지 않은 일 아닌가? 대국들을 상대로 국력의 차이를 넘어서는 세련된 카드를 쓰는 것이 외교안보 전문가들에게 맡겨진 역사적 책무다.
김효순 편집인
hyos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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