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1.31 18:38
수정 : 2006.01.31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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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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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햇발
1998년 초, 한국이 국제통화기금(IMF) 체제로 들어간 직후였다. 〈세계화의 덫〉을 쓴 하랄드 슈만을 서울에서 만났다. 그는 “한국은 왜 말레이시아처럼 아이엠에프 처방을 거부하지 못하느냐”고 물었다. 아이엠에프 처방은 한국경제를 더 깊은 수렁에 빠져들게 할 것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상당 부분 동의하면서도,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이유의 하나로 석유를 비롯한 에너지 대부분을 외화로 사야 하는 처지를 들었다. 외화 고갈은 곧 석유 부족으로 이어질텐데 누가 그런 모험을 할 수 있냐고 되묻기도 했다.
그와의 만남이 떠오른 건, 세계 에너지 자원 시장의 변화가 예사롭지 않은 까닭이다. 올 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에 벌어진 천연가스 분쟁은, 가스를 포함한 석유자원 무기화가 언제든 현실화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베네수엘라와 볼리비아, 이란은 석유 무기화 가능성을 공공연히 내비치고 있다. 석유시장은 가뜩이나 살얼음판 같다. 작은 변수에도 금세 기름값이 요동친다. 이런 마당에 몇몇 산유국이 석유 무기화를 실행에 옮긴다면 파장은 가늠하기 어렵다. 석유 공급 능력면에서 지금보다 한층 여유가 있었던 1, 2차 석유위기 때보다 더 혹독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지금 당장 위기가 닥쳐, 세계 석유시장이 산유국들이 좌지우지하는 시장으로 되돌아간다면 우리는 어찌될까? 외환 보유액이 넉넉하니 얼마든지 석유를 사올 수 있을까? 우선적으로 석유를 대줄 곳은 얼마나 있을까? 대답은 모두 ‘글쎄’다. 중동문제에서 사사건건 미국 편을 들어온 한국을 중동 산유국들이 예쁘게 보고 있을 리 없고, 이들 나라 핵심 인물들과 끈끈한 교분을 쌓아두지도 못했다. 러시아도 기댈 언덕이 못 된다.
한국이 특별 대접을 받을 만큼 투자하고 공들인 게 없다. 그동안 외국 유전 개발이나 유전 매입으로 확보한 물량이라도 제법 될까? 갑갑하긴 마찬가지다. 국내 소비량의 10%까지 끌어올리겠다는 말을 들은 지 오랜데 아직도 4% 안팎이다. 위기 땐 언발에 오줌누기만도 못 될 양이다. 과거 석유위기 때 정부 고위 당국자들이 산유국들 쪽에 읍소하며 다니던 모습이 겹쳐진다. 서울 아파트 숲 주민들이 난방연료 부족으로 한겨울에 차가운 시멘트 덩어리 속에서 덜덜 떠는, 심한 상상도 해본다. 에너지 문제에 관한 한 정부는 참 배짱이 크다. 자원외교란 개념이 당국자들 머릿속에 있기나 한지. 위기 불감증이다.
에너지 쪽을 전담하는 동력자원부가 있던 때는 좀 나은 편이었다. 동자부가 없어진 1993년 이전만 해도 산유국의 거물급들이 자주 한국으로 초청됐다. 그들이 오면 동자부 공무원들은 손님들이 귀에 입이 걸릴 만큼 흡족한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게 대접에 힘을 쏟았다.
대통령이 산유국을 방문하지 못하면 장관이라도 다녀 끈을 이어가려 했다. 괭이를 쥐어주면 땅이라도 판다는데, 이젠 그런 노력도 없다. 석유 소비량 세계 7위권, 수입량 4위권이면서도 기름 한방울 나지 않는 나라, 석유가 모자라면 경제와 국민생활이 송두리째 흔들릴 나라에서 장관 자리 하나 줄였다는 생색내기가 에너지 정책보다 더 무게 있었던가.
미국 시카고대학은 핵과학회지 〈블리턴〉에 핵전쟁 위험을 경고하는 지구종말 시계를 싣고 있다. 파국을 뜻하는 자정 7분 전에 맞춰져 있다. 석유위기, 또는 석유전쟁 시계가 있다면 몇 시 몇 분을 가리킬까? 지구종말 시계보다 자정에 더 가까이 가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국 시계는 대낮쯤에서 멈춘 듯하다.
김병수 논설위원
byungs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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