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2.02 19:33
수정 : 2006.02.02 19:33
|
위상복 전남대 철학과 교수
|
기고
돈은 우리의 가장 가까이 있는 무엇이지만, 돈이란 우리말의 어원을 나는 모른다. ‘돌다’란 말에서 왔다고도 하는데, 그런지도 모르겠다. 대저 돈이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떠돌아다니는 것을 보면 그렇게 이름이 붙었다는 것도 그럴 듯하다. 또는 우리를 돌아버리게 하는 물건이 돈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돈에 주눅이 들어 ‘돈 없는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도 흔하고 보면 어쨌든 그런 의미의 ‘돈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는 우리에게 돈이란 말은 신비스럽다.
내 어린 기억에는 처음으로 만지기 시작한 돈 속에 ‘국부’ 이승만이 찍혀 있었다. 그래서 돈이 그리워질 때마다 이승만이 떠오르곤 한다. 돈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호주머니 깊숙이 쑤셔넣고서 만지작거리던 돈에 대한 추억은 이승만과 함께 가슴 속에 꽉 박혀 있다. 그리고 모르는 사이에 언제부턴가 그것은 조선시대 유학자 율곡 이이와 퇴계 이황으로 바뀌어버렸다.
얼마 전 천원권 지폐를 약간 작게 하고, 그 색깔도 바꾼다는 기사를 읽었다. 이황의 초상이 앞면에, 도산서원이 뒷면에 담겨 있는 천원권은 23년 전 박정희 정권 때 만들어졌다. 이번에 그 앞면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크기와 보조소재를 약간 바꿔 발행하는 셈이다. 만원권, 오천원권, 천원권 지폐를 들여다보면 조금 야릇한 느낌이 든다. 세종, 이이, 이황의 초상을 어떤 화가가 그렸으며, 왜 우리의 지폐에 그들의 초상이 새겨져야 했던가 하는 의문이다.
한글 창제의 세종이야 그렇다 하더라도 이이나 이황이 둘 다 조선시대의 유학자이고 보면, 전통적인 불교와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라도 신라의 원효나 고려의 지눌이 들어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좀 엉뚱한 생각도 든다. 누가 지폐에 넣을 인물로 이이와 이황을 추천했는지도 궁금하거니와, 일제시대에 희생된 독립투사들도 숱할 터인데 조선시대와는 다른 국가체제 속에 유학, 그것도 성리학을 국가 이념으로 신봉하는 것도 아닌 대한민국에서 현실적 보편성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 왜 지폐에 새겨져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나는 한국은행이 어떠한 절차를 거쳐 그 도안에 들어갈 인물과 보조소재를 선택하며, 왜 그와 같은 선택을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새 천원권 뒷면 그림으로 도산서원 대신 겸재 정선의 산수화가 채택된 이유를 알고 싶기도 하다. 그 이유가 비록 평범한 것일지라도, 한 국가와 사회의 상징성을 드러내는 화폐 속 인물이고 산수화이고 보면 그저 무작정 풍문에 가탁하여 우연에 내맡길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그 이유에는 아무 관심도 없이 무심코 돈을 꺼내고 집어넣고 한다고 해도 기왕이면 우리의 오늘을 있게 한 정의로운 표상적 인물을, 특히 내 개인적인 소견을 덧붙인다면 일제로부터의 해방과 독립에 헌신했던 사람을 가슴에 품으며 매일 돈 속에서나마 만날 수 있다면 좋겠다는 희망을 품어본다.
돌이켜보건대 박정희의 국민교육헌장과 유신체제 이념에 이황의 ‘경(敬)’사상을 국민도덕으로 유난히 강조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지난 1960년대이던가, 도산서원도 서둘러 대거 중창을 했겠지만 그것이 혹여 일제시대의 왜곡된 그늘을 덮기 위한 역사의 위선이라고 한다면 참으로 이황에게도 욕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황을 돈에 새겨 팔아 국민교육헌장과 유신체제를 정당화하는 것이 되려 이황에게 치욕이 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제 우리는 그런 아픈 기억 따위는 지울 때가 되었다.
위상복/전남대 철학과 교수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