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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2.05 21:55 수정 : 2006.02.05 21:55

사설

한 시민이 황우석 교수의 연구 재개를 요구하며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분신했다. 어처구니가 없다. 그러나 이 분신을 개인의 문제로 돌려서는 안 된다. 지난달 19일 대구에선 한 시민이 ‘황 교수를 살려내라’고 요구하며 독극물을 마시고 자살을 시도했다. 우리 사회의 극단적 쏠림이 빚어낸 희생인 것이다.

지금 이와 비슷한 충동을 느끼는 사람은 한둘이 아니다. 인터넷 카페 ‘아이러브 황우석’에는 분신한 이에 대한 추모의 글이 2000여통이나 올랐다.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황 교수 연구재개 지원을 위한 촛불행사에는 강추위 속에서도 2천여 지지자들이 모여들었다.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사람들은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느끼려는 경향이 강해진다. 아는 만큼 보는 것도, 보는 만큼 느끼는 것도 아니다. 현실을 사실이 아니라 믿음으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황 교수 사건은 그 좋은 사례다. 사건 초기부터 옳고 그름이 신념화됐고, 소통은 단절되고, 양극단 사이의 오해와 미움은 극단으로 뻗어나갔다.

어떤 누리꾼은 이번 사건을 ’영생교 교주가 체포됐을 때 영생교도가 보인 행동’에 비교했다. 오늘 우리가 겪는 단절을 상징한다. 그는 구원 혹은 이해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 유서엔 ‘대한민국이 실망스럽다’고 적혀 있었다고 한다. 황 교수 사건은 모두의 상처다. 지지 혹은 증오에 갇혀서는 상처를 치유할 수 없다. 신념의 감옥에서 빠져나와, 상대의 진정성을 인정할 때 단절은 극복되고 상처는 치유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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