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2.07 20:01
수정 : 2006.02.07 20:01
사설
삼성은 국민의 눈에 양지와 음지가 겹친 모습으로 비쳐 왔다.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 기업, 젊은이들이 가장 들어가고 싶어하는 기업이란 양지 뒤쪽에는, 봉건적 지배구조와 경영권 편법 세습, 권력화와 노조 불인정 등 어두운 음지가 있다. 삼성이 이제 음지의 그늘을 걷어내겠다고 나섰다.
삼성은 어제 ‘국민께 드리는 말씀’을 통해, 에버랜드 전환사채 증여, 대선자금과 ‘엑스파일’ 문제 등으로 물의를 빚은 데 대해 사과하고, 이건희 회장 일가의 사재 출연을 포함해 8천억원의 기금을 사회에 헌납한다고 밝혔다. 공정거래법과 증여세와 관련해 정부를 상대로 낸 소송은 취하하겠다는 뜻도 담았다. 경영투명성을 높이고, 중소기업과 협력회사 지원 방안도 내놓겠다고 한다.
한걸음 나아간 모습이다. 오랜 외유 끝에 지난주말 귀국한 이 회장이 “국민들의 기대와 뜻에 부응하는 데 소홀했다는 착잡한 심경을 토로했다”는 대목에서는 고심의 흔적이 배어 있기도 하다. 이런 움직임이 단순히 삼성과 이 회장 일가가 부닥친 어려운 국면을 모면하기 위한 것이 아니길 진심으로 믿고 싶다. 록펠러 가문을 비롯한 미국의 초기 재벌들이 독과점 횡포와 노조 탄압 등으로 지탄받다가 종래는 사회공헌에 힘쓰게 됐던 과정을 우리 재벌들도 이제는 밟게 되려는가 하는 기대도 해본다. 한국 재벌이 진화하는 시발점이 됐으면 한다.
하지만 삼성 때문에 나라가 시끄러워도 버텨오다가 이제 갓 변화를 보인 것일 뿐이라는 냉혹한 평가도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삼성이 진정 국민과 함께하는 기업이 되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는 너나가 없다. 삼성이 이 회장 귀국 후 큰 구상을 밝힐 것이란 말에, 이것이 삼성을 둘러싼 논란에 마침표를 찍는 계기가 될 수 있길 기대했다. 잔치에 재 뿌리고 싶은 생각은 결코 없지만 따지지 않을 수 없는 심정 또한 착잡하다.
삼성 문제의 근원은 금융 계열사를 이용한 지배구조와 불법 증여를 통한 경영권 세습, 그리고 ‘삼성공화국’이란 말로 상징되는 권력화에 있다. 이번에도 이 대목에서는 절실한 반성과 뚜렷한 대안 제시가 없다. 에버랜드와 삼성생명을 축으로 한 삼성 지배구조나 무노조 경영 문제는 애써 피했다. 편법 증여를 통해 이 회장의 아들 이재용씨가 얻은 부당 이득은 1조원이 넘고, 경영권 승계 기반을 구축한 것까지 합하면 그 값어치는 천문학적이다. 잘못된 행위의 결과는 그대로 둔 채 이뤄지는 일부 사재출연을 국민들이 어떻게 볼까.
‘엑스파일’ 사건을 비롯한 잘못된 과거 행태에 대해서도 사과에 앞서 진실 고백이 있어야 했다. 물론 모두 털어내긴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수용될 접점은 있다. 본질적 문제를 회피하고 미련을 털지 못한 건 삼성이 여전히 안고 있는 한계로 비친다.
그럼에도 삼성의 이번 결단이 큰걸음의 시작이고, 삼성에 대한 국민의 희망 수위를 한단계 높였다고 본다.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법이다. 우리는 삼성이 진정 변하려는 모습을 보이길 바란다. 본질적 문제에 대한 대안을 내놓지 못한 게 미처 준비하지 못한 탓이라면 시간은 아직도 있다. 좀더 전향적인 대안을 찾고, 삼성 스스로가 밝혔듯이 중소기업과 협력회사, 그리고 종업원과 상생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삼성의 음지는 차츰 걷혀갈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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