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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2.17 19:57 수정 : 2006.02.17 19:57

사설

엊그제 노무현 대통령은 “국내 이해단체의 저항 때문에 (한-미 자유무역협정이) 못 가는 일은 절대로 없도록 하자”고 했다. 친절하게도 “어린아이는 보호하되 어른이 되면 독립하는 것 아니냐. 한국 영화가 어느 수준인가”라고 말해, 지목한 대상이 스크린쿼터 축소 반대자들임을 분명히했다.

반대자가 소수라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한때 정부와 보수언론이 한-미 자유무역협정의 터무니없는 장밋빛 미래상을 폭죽처럼 쏘아올릴 때만 해도 반대 의견은 20% 안팎에 그쳤다. 그러나 거품은 쉽게 가라앉았고, 여론은 반전하기 시작했다. 축소 발표 뒤 20일 만에 반대 의견은 75.6%에 이르렀다.(14일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조사) 과연 이 많은 국민의 의견을 이해집단의 저항으로 칠 수 있을까. 설사 이해를 앞세우더라도, 귀기울여 마땅한 규모다.

노 대통령은 또 이렇게 말했다. “개방한 나라가 성공도 하고 실패한 경우도 있지만, 쇄국해서 성공한 경우는 한번도 없다.” 우리의 시장 개방성을 쇄국 수준으로 보는 듯하다. 그러나 공산품 시장은 선진국 수준으로 개방돼 있다. 자본·금융 시장은 지나치게 개방돼 있어 문제다. 법률·의료·교육 등 서비스 시장이 닫혀 있긴 하지만, 개방에 대한 반발이 아직 심하게 표면화하지는 않고 있다. 남는 건 농산물과 영화다. 이것을 두고 쇄국이라고 한다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다. 선진국에서도 농산물과 문화시장 개방은 제한한다. 식량 생산은 국방력과 함께 나라의 생존과 직결돼 있다. 영화는 문학 음악 미술 연극 그래픽 등 문화적 역량의 총합으로서 문화적 정체성 차원에서 논의된다.

우리 영화는 세계 시장의 80%를 장악하고 있는 할리우드와 비교하면 싸움 상대가 안 된다. 경쟁력의 문제가 아니라 체급의 문제다. 할리우드가 막강한 자본과 콘텐츠를 앞세워 유통을 틀어쥔다면, 아마 〈웰컴투 동막골〉이나 〈왕의 남자〉마저도 제작되지 못했을 것이다. 헤비급과 플라이급을 맞붙이는 건 공정 경쟁이 아니다.

옛적에 전쟁에서 진 나라는 항복 표시로 승전국에 장수의 목을 건넸다고 한다. 정부는 협상에 앞서 미국에 스크린쿼터 축소(영화인)와 쇠고기 수입(축산농민)을 헌상했다. 노 대통령은 엎드려 사과할 일에 호통을 치고 있다. ‘얼굴을 붉히더라도 할말은 하겠다’던 대상은 우리 국민이 아니라 미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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