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4.12 19:47
수정 : 2006.04.12 19:47
사설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에 이어 <왕의 남자>가 1천만 관객을 동원하면서, 한국 영화는 최고 전성기를 구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국영화의 황금기는 1960년대였다. 그때 국민 1인당 극장영화 관람 편수는 지금보다 20~30% 높았다.
당시 우리 영화가 황금기를 맞게 된 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었다. 텔레비전이 대중적으로 보급되기 전이었고, 미국 할리우드 영화가 한국 시장에 눈독 들이기 전이었다. 게다가 우리 영화계엔 유현목, 신상옥, 김수용, 이만희, 김기영 등 최고의 감독들이 있었다. 이들은 높은 작품성과 흥행성으로 관객을 극장으로 끌어들였다.
그 가운데서도 신 감독은 특별했다. 감독으로서 그는 외국에서도 능력을 인정받았다. <성춘향>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는 일본과 베니스 영화제에 초대됐다. 1961년작 <상록수>는 2003년 칸영화제 회고전에 초대받았다. 나아가 그는 50년대 ‘신상옥 프로덕션’(신필름)을 세웠다. 우리나라 최초의 기업형 영화제작사였다. 신필름은 70년대까지 영화 사관학교 구실을 했다. 게다가 그는 납북 혹은 월북 여부를 떠나 남북을 오가며 작품활동을 했다. 북쪽에서 제작한 <불가사리>는 남쪽 스크린에 걸린 첫 영화였다.
한국영화의 황금기를 연 거장이 그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우리 영화의 오랜 침체기와 최근의 르네상스까지도 지켜봤다. 스크린쿼터 축소로 영화계에 위기가 다시 엄습하는 시점에서 거장을 보냈으니 영화계의 상실감은 크다. 다행히도 그는 위기 극복용 열쇳말을 하나 남겼다. 우리 고유의 경험·모순·정서를 소재로, 보편적 가치를 구현하라는 것이 그것이다. 참을 수 없이 가벼워지는 경향 속에서 후배 영화인들이 꼭 실천해야 할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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