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8쪽의 적은 지면으로 세상에 등장했던 <한겨레>가 오늘 창간 18돌을 맞았다. 통제된 왜곡 언론에 진저리를 내던 국민의 소중한 눈과 귀가 되기를 바라면서 창간 작업에 박차를 가하던 무렵에 치러진 1987년 말의 대통령 선거는 민주화 진영의 분열로 권위주의 세력의 집권을 연장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참된 민주주의와 대동세상에 대한 열망이 삽시간에 바닥이 보이지 않는 허탈감으로 바뀌던 시절, ‘우리는 민주화는 한판의 승부가 아닙니다’란 표어로 국민들의 처진 어깨를 감싸안으려고 애썼다. 18돌을 맞은 오늘, 우리 사회가 여러 부문에서 홍역을 앓고 있는 점을 보면서 이 표어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평화·상생·정의 여전히 주요 화두 현재 평택 대추리를 무대로 벌어지고 있는 사태는 나라 안팎의 문제가 복합 다층적으로 얽힌 것이다. 우리 사회의 모순이 집약돼 있다고 할 수 있다. 한말 청의 위안스카이가 이끈 간섭군이 주둔한 이래 용산 기지는 한국 현대사에서 치욕과 회한의 상징이었다. 수도권 한복판에 버티고 있는 외국군 기지가 옮겨가는 것이 하나의 발전임에는 틀림없다. 여기에 미군의 세계적 재편에 따른 전략적 유연성 문제가 겹쳐 주한미군의 위상, 장래 역할에 대한 의구심이 높아졌다. 미국을 제외하더라도 이 지역의 다른 패권국가들의 동태도 심상치 않다. 남북 관계는 민간 부문 교류의 비약적 증가와 경의·동해선의 시험운행 합의에도, 답보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남북 화해와 통일 국가의 방향성 등을 포함한 이런 문제들에 대한 성숙하고 밀도 있는 국민적 토론 없이 대추리에 투영된 갈등을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양극화 문제에 대한 사회의 대응을 보더라도 우리 수준이 얼마나 낮은 단계에 있는지를 절감한다. 목소리는 요란하지만 변변한 대책이 나오지 않고 있다. 정치적 민주화, 절차적 민주화가 상당한 진전을 이룩했다고 해서 서민들의 고단한 삶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세계화의 격랑 속에서 연령층에 상관없이 두루 나타나는 고용과 생계에 대한 불안은 노동계층의 유대를 파괴하고 갈등을 촉발시켰다.저급한 정파적 저널리즘 단호히 거부 이밖에도 한-일의 과거사 알력, 국내 이주노동자의 열악한 환경, 탈북자와 북한 인권 문제, 난개발과 환경 파괴, 황우석 사태로 드러난 윤리 실종 등 사회를 짓누르고 있는 난제들을 생각하면 우리가 매달려야 할 화두는 여전히 평화와 상생과 정의로 모아진다. 국가 사이의 이해 대립, 사회 계층·집단 사이의 알력과 이해 충돌이 워낙 심각하므로 유효한 처방전을 마련하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의제의 중요도를 매김하고 소통과 대화의 장을 널리 열어 차분히 공론을 만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론 특히 신문이 사회의 공기로서의 구실을 다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많은 보수신문들의 현실을 보면 이런 당위에서 한창 벗어나 있다. 의견을 달리하는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하고 합리적 논리로 설득하려 하기보다는 자신의 주장만 일방적으로 퍼부어대는 저급한 행태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정파적 이해 득실이 마치 뉴스 가치를 판단하는 데 최고의 기준이 된 듯하다. 독자, 나아가 국민을 바보로 여기는 이런 어거지식 신문 제작이 자기파멸적 가공할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은 자명하다. 2004년 한국언론재단이 실시한 ‘언론수용자 의식조사’를 보면 신뢰성 평가에서 텔레비전은 2년 전보다 1.4포인트 늘어난 49.8%인데 비해 신문은 오히려 1.1포인트 줄어든 18.8%로 나왔다. 특정사안에 대해 상이한 매체가 동시에 보도했을 경우 가장 신뢰하는 쪽을 묻는 설문에는 텔레비전이 62.2%로 압도적 우세를 보였고, 신문은 인터넷(16.3%)보다도 약간 처진 16.1%로 3위로 밀렸다. 우리는 지난해 제2창간을 선언하면서 통일시대에 대비하고 사회의 갈등 구조를 슬기롭게 풀며 독자들과 소통을 강화하겠다고 다짐했다. 올해 들어 신문사의 공식 기구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시민편집인 제도를 신설해 한겨레가 창간 당시의 초심을 잃어가고 있지는 않은지 엄정하게 검증하고 있다. 또한 각계의 전문가들을 모아서 굵직한 현안들에 대해 합리적인 대안들을 모색해왔다. 그렇지만 곳곳에 미흡한 구석이 널려 있다는 것을 솔직히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세상보는 창’ 기능 제대로 할것 신문이 독자의 신뢰를 찾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세상을 보는 창으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보도와 논평의 공정성과 신뢰성이 담보되지 않으면 신문은 사상누각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정파적 저널리즘, ‘떼쓰기’ 저널리즘의 악폐를 단호히 거부하고 공정성과 신뢰성 증진을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나갈 것이다. 한겨레란 창을 통해서 세상이 투명하게 보인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나갈 수 있도록 깊이 있는 정보와 편견 없는 분석을 제공하기 위해 정진해나갈 것을 독자와 시민사회에 엄숙하게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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