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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 강국’ 주춧돌 놓은 조남철 선생 |
한국 바둑계의 큰별이 졌다. 그제 타계한 조남철 선생의 삶은 60년 한국 바둑의 역사 그 자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바둑계는 물론 1천만 애호가들의 아쉬움이 큰 이유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고인은 광복 직후 불과 22살 약관의 나이에 서울 남산동에 한국기원의 전신인 한성기원을 설립했다. 목표는 바둑의 현대화·국제화·대중화였다. 고유의 순장바둑을 현대바둑 체계로 개혁하는 동시에 국제 시합을 적극적으로 유치했다. 나아가 당시 한량들의 잡기쯤으로 여겼던 바둑의 대중화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이 때문에 고인의 발자취에는 늘 최초란 수식어가 붙어다녔다. 1950년 최초의 전문기사 제도 도입, 55년 최초의 국제시합 개최, 56년 최초의 기전인 국수전 우승 등등.
단지 바둑에 대한 열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14살 때 일본으로 건너가 한국인 최초의 전문기사가 된 그는 나라 없는 혹독한 설움과 차별을 겪었다. 일본기원 화장실에서 몰래 울던 소년은 ‘기도보국’(棋道報國)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게 됐고, 이는 전쟁통에 십수 차례나 사무실을 옮겨다니면서도 기원의 명맥을 이어 간 가장 큰 동력이 됐다. 일본의 선진 바둑을 배워야 한다며 김인·조훈현·조치훈 등 후배들의 일본 유학을 적극 지원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런 밑거름이 없었다면, 70~80년대 한국 바둑의 중흥을 이끈 조훈현과 서봉수, 90년대 세계를 제패한 바둑천재 이창호의 존재는 불가능했을지 모를 일이다.
우리나라 바둑 인구는 한때 36%에 이르렀지만 지금은 20%에 그치고 있다. 젊은 세대의 취향이 변한 탓도 있겠지만 국제대회를 휩쓸던 한국 바둑의 위력이 주춤해진 때문이기도 하다. 올해 카타르 도하에서 열리는 아시아 경기대회에선 바둑과 같은 두뇌 스포츠인 체스가 정식 종목으로 채택됐다고 한다. 한국 바둑이 제2의 도약에 나서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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