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10.08 21:58
수정 : 2006.10.08 21:58
사설
달력 속 기념일로만 기억되던 한글날이 올해부터는 국경일로 기념하게 됐다. 세계엔 말을 적는 수많은 글자가 있지만, 글자가 창제된 날을 국경일로 기념하는 나라는 드물다. 그건 제 나라 글자의 고마움을 몰라서가 아니다. 누가 언제 왜 어떻게 만들었는지 모르거나, 수입된 문자를 쓰고 있기 때문일 뿐이다. 기념하려야 할 수도 없는 일이다. 로마자도 마찬가지다.
한글은 기념할 조건을 두루 갖췄다. 인간적인 창제 이유, 천·지·인의 세계관이 관철된 창제 원리, 과학적인 구성 원칙 등이 명시돼 있다. 유네스코가 한글을 세계 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하고, 세종대왕상까지 만들어 문맹률을 낮춘 개인이나 단체에 주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우리의 문맹률이 0%에 가까운 것은 한글의 간결함과 과학성 때문이다. 중국과 미국의 문맹률은 각각 50%, 21%에 이른다. 과학성으로 말미암아 기계적 친밀성도 뛰어나다. 컴퓨터로 메시지를 전하는데, 한글은 일본어나 중국어보다 7배나 빠르다. 정보화 시대의 총아로 꼽히는 글자다.
그러나 우리 국민은 한글을 삼등 언어로 여긴다. 증권거래소 상장사 세 곳 가운데 두 곳, 그리고 코스닥 상장사 네 곳 가운데 세 곳은 영어 이름이다. 말글살이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공중파 방송은 프로그램 제목에 ‘개그夜’ ‘클릭, 세상事’ 따위의 이름을 아무렇지 않게 붙인다. 경기도만 해도 영어마을 두 곳 운영비로 매년 300억원 가까이 쓴다지만, 국립국어원의 연간 예산은 80억원에 불과하다. 한국통신, 서울지하철, 담배인삼공사 등 내국인을 주로 상대하는 공기업조차 이름을 케이티(KT), 서울메트로, 케이티앤지(KT&G) 따위로 바꿨다. 법전이나 대중가요는 한글의 무덤이다. 핀란드는 영어권 밖에서 영어 구사력이 세계 최고라지만, 제 나라 말을 이렇게 죽이는 일을 그냥 두지 않는다.
국경일 지정이 기념행사 수준을 높이는 것에 그쳐선 안 된다. 한글의 무한한 잠재력을 실생활 속에 구현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한글 글꼴을 다양화하고, 미적으로 우수한 한글 디자인을 개발해 각종 상품과 제품 디자인에 이용하도록 해야 한다. 법규를 알기 쉬운 우리말로 바꾸고, 공공기관부터 우리 이름을 갖도록 해야 한다. 방송·신문은 우리 말글살이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정보화 시대, 조금만 마음을 쏟아도 한글은 막대한 문화적 경제적 가치를 창출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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