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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10.15 22:35 수정 : 2006.10.15 22:35

사설

또 한분의 의인이 졌다. 병마와 오랜 투쟁 끝에 그제 타계한 1세대 인권변호사 홍남순 선생은 한평생 인권 옹호와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온몸을 바친 시대의 양심이었다. 암울했던 독재 시절 홍 변호사의 변론은 민주의 함성이었으며, 그의 발걸음은 어둠을 비추는 등불이었다.

1963년 변호사 사무실로 문을 연 광주시 동구 궁동 15 그의 자택은 ‘호남 민주화운동의 산실’이었다. 항상 열려 있는 대문으로는 광주·전남의 민주인사들이 밤낮없이 드나들면서 가슴 속에 민주주의를 키웠다. 그는 광주에 몸을 디디고 있었지만, 전국이 활동무대였다. 71년 민주수호국민협의회 결성에 깊숙이 가담해 전남지부 대표를 맡았으며, 양심수 무료 변론을 위해 서울과 광주를 오르내렸다. 국회의원 유옥우씨의 한-일 협정 반대 발언 사건과 시인 양성우씨의 ‘겨울공화국’ 시집 사건, 박석무 김남주씨 등의 국가보안법 사건, 송기숙 교수의 교육지표 사건 등이 대표적이다.

이돈명 변호사는 그가 “법조문으로 변론을 하기보다는 인간의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양심과 정의로 변론”했다고 기렸다. 세상은 그를 ‘대인’으로 불렀다.

홍 변호사는 5·18 광주를 끝까지 지킨 큰 어른이었다. 군의 강제 진압 하루 전인 26일에는 16명의 수습위원들과 함께 예순 여덟의 나이에 ‘죽음의 행진’에 나서 불의에 항거했다. 내란선동죄 등으로 1년7개월 간 모진 옥살이를 했으며, 출소 뒤에는 5·18 진실규명과 명예회복, 군부독재 반대에 앞장섰다. 그러나 그는 민주화가 이뤄진 뒤 5·18 보상이 시행될 때 “소신껏 참여한 일에 무슨 보상이냐. 죽은 사람들에게 부끄럽다”며 보상 신청을 단호히 거절했다. 6·25 전쟁 때 마흔이 다 된 나이에 자진해서 참전했던 곧은 삶의 자세 그대로다. 의로움의 크기가 도저하다.

변호사 직업은 돈벌이가 좋아 인기가 갈수록 하늘을 찌르고 있으나, 요즘 참 변호사를 찾기란 쉽지 않다. 독재 시절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던 대한변협도 이익단체로 변한 지 오래다. 인권옹호와 사회정의 실현이라는 변호사의 사명을 온몸으로 실천한 그가 더욱 그리운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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