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10.24 21:44
수정 : 2006.10.24 21:44
사설
지난 2월 사상 초유의 화폐 리콜 소동을 벌였던 조폐공사가 인쇄 잘못으로 10만원권 수표를 다시 수거하고 있다. 같은 용지에 다른 일련번호가 새겨진 수표가 890장이나 금융권에 공급됐다. 10만원권 수표가 화폐는 아니지만 사실상 화폐나 다름없이 유통돼 왔다는 점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5천원권 리콜 이후 불과 8개월 만에, 당시 잘못 인쇄된 10장보다 훨씬 많은 890장의 불량 수표가 유통됐다는 사실로 봐도 단순한 실수로 넘어갈 수 없는 사안이다.
화폐는 나라경제를 원활하게 돌아가게 하는 혈액일 뿐 아니라 국가를 떠받치는 근간이 되는 요소다. 역사적인 경험을 보더라도 화폐가 흔들리는 것은 그 나라의 존망과 연결되는 경우가 많다. 1980년대 말 옛소련이 무너질 때 사람들이 루블화보다 담배를 더 가치있는 교환수단으로 쓴 것이 대표적 사례다.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다. 정국이 혼란스러울 때는 금값이 오르고 달러 사재기가 일어난다. 거창하게 국가의 운명을 얘기할 것도 없다. 위조지폐 몇 백 장으로도 사회는 큰 혼란에 빠질 수 있다. 그래서 화폐에 대한 신뢰를 손상할 사고는 아무리 사소해도 용납될 수 없다.
조폐공사는 돈만 인쇄하는 곳이 아니다. 수표와 상품권, 그 밖의 각종 유가증권을 인쇄한다. 정부가 추진 중인 전자주민증 발급도 조폐공사가 맡기로 돼 있다. 위조방지 분야의 기술력을 인정받아 인도네시아 은행권 용지와 이스라엘 및 타이의 주화도 제작하고 있다. 이번 사태의 원인은 단순한 기계오류 감지장치 미작동 때문이었다. 일련번호가 잘못 인쇄되면 경고 신호가 울려야 하는데 그것이 울리지 않았다. 큰 조직이 작은 구멍 하나를 막지 못한 것이다.
5천원권을 거둬들일 당시 사고의 원인은 공정관리 부실과 개인의 부주의로 밝혀졌다. 이해성 조폐공사 사장은 재정경제부 장관으로부터 기관장 경고 처분을 받았고, 31명의 직원이 사내 징계를 받았다. 그러나 대부분 주의·경고·견책 등이었고, 가장 중징계를 받은 사람이 정직 1개월이었다. 조폐공사는 또 사내 워크숍을 통해 재발 방지와 지속적인 조직 혁신을 다짐했다. 이번 사고의 원인이 기계 오작동 때문이라고 기계를 탓할 수는 없다. 관리 소홀이란 말로 몇몇 실무자에게만 책임을 떠넘길 일도 아니다. 관리시스템을 근본적으로 재점검해봐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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